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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Mar 27. 2021

망고 커피에 숨겨져 있던 메시지

여행 에세이, 일본, 미야자키

미야자키 여행 둘째 날. 첫 일정은 버스로 한 시간이 좀 넘게 걸리는 ‘우도 신궁(鵜戸神宮)’이었다. 시내에서 우도 신궁을 거치는 노선은 965번 딱 하나여서 발품 팔아 버스 노선을 검색할 수고는 덜었지만 배차가 한 시간에 한 대라 버스 시각을 잘 맞춰야 했다. 시내를 떠난 버스는 해안도로와 꼬불꼬불 산길을 번갈아 달리며 이른 아침의 몇 안 되는 탑승객에게 깜짝 선물 같은 풍경을 건네주었다. 버스에선 잠을 자기 마련인데 창밖을 보느라 잠시도 눈을 붙이지 않고 있었더니 어느새 신궁에 도착했단다. 정류장에서 신궁까지의 길은 여느 일본 관광지처럼 상점가로 조성되어 있었다. 이제 막 열시를 넘긴 이른 시간이라 아직은 문 닫힌 가게가 더 많았따.     

문 닫힌 상점들 사이를 지나는데 홀로 문이 열려 있던 오른편의 카페에서 누군가 갑자기 ‘오하요- 고자이마스’, 부드러운 톤으로 인사를 건넸다. 장사 준비를 하던 주인아주머니였다. 습관적으로 건넨 인사려니 무심히 지나치려 하다가 그 앞을 지나는 사람이 나뿐임을 깨닫고 대답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다고 콕 짚어 내게 한 인사도 아닌 거 같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같은 인사를 건넸다.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데크레센도 되어 마지막 세 글자가 묵음 처리되는 바람에 괜히 쑥스러운 인사였다. (오하요- 고자... 응?)


멀리 신궁에서부터 들려오는, 절벽에 얕게 부딪히는 파도 소리에 아주머니의 인사가 실려 코 끝에 닿은 아침 공기에도 기분이 좋아졌다. 조용한 카페에서 책을 읽는데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풍경 소리처럼 맑은 소리의 인사. 이 상쾌하고 명랑한 기분으로 신궁에 들이닥친 단체 관광객의 행렬에 금세 사라져 버렸다. 접근성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이 없을 뿐, 신궁을 찾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았다. 발 디딜 틈이 없이 신궁이 붐빌 즈음 조금 서둘러 정류장으로 가기로 하고 아까 그 상점가를 거슬러 걸었다. 정류장으로 향하는 고요한 걸음 걸음에 다시 한 번 명량한 인사가 포개졌다. 아까 그 아주머니는 ‘어서 오세요.’ 대신 ‘잘 다녀오셨나요.’라는 인사를 건넸다.


신궁으로 이어진 길은 그 골목이 유일해서 나올 때도 무조건 그 길로 나오니 잘 다녀왔냐는 인사도 꼭 내게만 한 건 아닐 텐데, 아침에 받은 인사가 떠올라 가던 걸음을 멈추고 카페에 들렀다. 카페 추천 메뉴에 웬 망고 커피가 있길래 마셔보기로 했다. 투명한 얼음 대신 노오란 망고 얼음이 채워진 블랙커피. 나쁘지 않은 ‘씁상씁상’(씁쓸하고 상큼한, ‘단짠단짠’의 패러디)이었다. 자기 딸이 나는 모르는 한국 아이돌 누구누구를 좋아한다면서 한국에서 온 날 더 반겨주었다. 그 친절한 마음에 더 머물고 싶었지만 버스 시간 때문에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버스를 기다리며 남은 커피를 홀짝거렸다. 망고 얼음도 와작와작 씹어가면서. 커피가 1/3 정도 남았을 때 숨겨져 있던 메시지가 드러나면서 난 아주머니에게 또 한 번 감동하고 말았다. 커피가 채워져 있을 땐 보이지 않던 고양이 뒷모습 그림이 서서히 나타났다. 그림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완성시키고 싶어 ‘스읍’ 커피를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토실한 고양이 엉덩이에서 물결무늬로 오른쪽으로 삐져 나온 꼬리를 눈으로 따라갔더니 짤막한 인사가 적혀 있었다. 동그랗게 한 번 말린 꼬리 끝에 적힌 메시지는


またきてね


'또 와요'였다. 


투명 플라스틱 컵 위에 네임펜으로 그려진 투박한 그림에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따뜻한 마음씨의 색이 칠해져 있었다. 버스에 오르기 전 입에 털어 넣은 남은 망고 얼음은 유독 더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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