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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Mar 10. 2021

훈민정음 창제 연도, 1443

여행에세이,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꽃보다 할배>를 통해서 입소문이 나 한국 관광객도 많이 찾았던 프랑스 동부의 작은 마을 스트라스부르. 도시를 떠올리면 '쁘띠 프랑스'라 불리는, 건물 외관에 듬성듬성 줄무늬가 불규칙적으로 성긴 낮은 주택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마을이라든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풍경을 가진, 쁘띠 프랑스에 약간의 파스텔톤이 더해진 근교의 더 작은 마을 '꼴마르'(Colmar)를 떠올리는 게 일반적이다. 혹은 정치, 외교 분야에 관심이 많다면 유럽 연합 의회, 평의회 등이 위치한 도시로 떠올리는 분도 계실 거고.


 그런데 뜬금없이 에세이의 제목은 훈민정음 창제 연도이다. 도대체 프랑스 동부 한 자락의 도시에 훈민정음이 무슨 관련이 있냐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역사적이나 외교적인 이유로 훈민정음이 이 도시에서 '갑툭튀'한 건 아니다. 그저 스트라스부르에서 겪은 불쾌한 경험 때문에 훈민정음 창제 연도를 뒤적여야 했던 사적인 기억 때문이다.


 요즘 김치, 한복, 김연아 등의 명사를 중국에서 자기들꺼라고 우긴다는 어처구니 없는 기사를 많이 접하는데, 그 행태와 맥락이 통하는 일을 아주 오래 전 스트라스부르 여행에서 미리 경험해 버렸다. 당시 떠오르고 있던 '카우치 서핑'에 도전해보고 싶었고, 그 도전 장소는 바로 스트라스부르였다. 날 받아준 호스트는 여행자에게 선한 여행력을 행사하는 자수성가한 기업가였다. 자수성가한 중년 싱글의 집엔 방이 세 개나 남아 있었다. 에어비앤비로 돈을 한 몫 챙길수야 있겠지만 남는 방 개수만큼이나 마음의 여유도 남아 있었는지, 방 세 칸을 궁색한 여행자들에게 베푸는 여유를 지닌 사람이었다. 


 같은 기간에 그 집에 카우치 서핑으로 머물던 다른 두 친구와 마음이 맞을 때면 도시를 함께 여행했다. 저녁엔 일을 마친 호스트와가 함께하기도 하고. 그 두 친구 중 하나는 예상하셨다시피 중국인이었다. 그가 처음부터 다짜고짜 중국 우월주의의 찌든내를 풍긴 건 아니다. 그럴 기미가 전혀 없이 잘 지냈는데 같이 마실을 나선 둘째 날 내게 망언을 했다.


 그 친구나 나나 모어가 영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둘 모두 영어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유창함을 지니지도 아니었다. 무슨 이야기였를 나누던 중이었는지 지금와서는 기억나지 않는데, 어쨌든 영어로 자유롭게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나누려니 서로가 답답함을 느끼던 때였다. 녀석이 먼저 내게 중국어는 할 줄 모르냐고 물었다. 'NO'라는 당연한 내 대답엔 전혀 당연하지 않은 질문이 돌아왔다.


 아니 한국어가 중국어의 한 방언인데, 왜 표준어(중국어)를 못하는 거야. 
한국 사람들은 다 중국말 하는 거 아니야?


 저 말도 역시 영어로 했으니 내가 제대로 이해를 한 건지 몇 번을 곱씹었다. 한국말과 중국말을 다 구사하는 연변 등지에 사는 조선족을 예로 든 거였다면 오해였다고 치겠다만, 한국 사람 모두가 중국말을 할 줄 안다고 오해하는 건 좀 말이 안 됐다. 한국어를 중국어의 방언으로 착각하는 거 자체도 어불성설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어떤 교육을 받으면 그런 소리를 스스럼 없이 하는지 화가 나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말라고 따졌다. 코웃음까지 치며 한국어는 중국어의 방언이 아닌 독자적인 언어라고 되받아쳤다. 


 그랬더니 한국어가 독자적인 언어라는 증거를 대란다. 증거는 바로 떠올랐다. 훈민정음.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쎄'를 기조로 세종대왕께서 창제한, 지금은 세계적으로 그 우수성이 입증된 우리말의 뼈대인 훈민정음이 버젓이 그 증거로 남아 있지 않은가. 훈민정음을 언급했더니 녀석은 고집스럽게 또 다른 질문을 이어갔다. 그 훈민정음이란 게 언제 만들어진 거냐고. 이미 국수주의가 머릿속에 뿌리 내린 녀석이 정말 창제 시기를 궁금해 했을리는 없다. 증거 따윈 없을 거라 생각했다가 난생 처음 들어보는 '훈민정음'이란 명칭이 튀어나온 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꼬투리를 잡는 모양새였다.


 문제는 훈민정음의 창제 연도가 떠오르지 않았다는 거. 학창시절 시험 대비용으로야 외웠겠지만 그건 그때뿐이지 않는가. '아이구아이구'(1919) 3.1운동처럼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연상법이 있지 않는 이상. 이건 국사나 우리말에 관심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연도까지 외우고 있는 게 과한 거라고 자기합리화를 하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당시엔 로밍도 안 해갔을 뿐더러 거리를 걷던 중이라 와이파이도 안 잡혔다. 인터넷을 켜 '훈민정음' 한 단어만 입력해도 창제 연도를 금방 확인할 수 있는데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다 거리를 거닐며 보는 풍경도 여행의 쏠쏠한 재미임을 퍼뜩 깨닫고 그냥 더이상 말을 섞지 않기로 했다.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는 심정으로. 


 저녁에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서 빛 축제가 열린다고 했는데 갑작스런 비로 행사가 중단이 되어 예정보다 일찍 숙소에 돌아왔다. 하루 일정을 마치니 잊고 있던 억울함이 몽실- 피어올라 와이파이를 연결해 훈민정음 창제 연도를 찾았내었다. 1443년. '폴틴, 포티쓰리' 아니면 '원 싸우전 포 헌드레드 포티쓰리 이얼'를 입에 익히며 녀석이 머무는 방에 노크를 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훈민정음은 1443년에 창제가 되었다고 다짜고짜 쏘아댔다. 녀석은 눈을 두어번 껌뻑... 껌뻑... 거린 후에 'Ah... OK.'했다. 그게 반응의 전부였다. 아까 계속 꼬투리를 잡은 이유는 내 예상이 맞았다. 증거와 사실을 들이 민대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국수주의적 고집 때문이란 거. 안 그래도 행사가 취소되어 빠져 나간, 더 빠져 나갈 것도 없는 김이 줄줄 새는 느낌이었다.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서 예정됐던 빛 축제는 우천으로 취소... 김 새는 기분이 더 배가되었다.


  요즘 우리 문화를 자꾸 자기네 것이라 우기는 중국에 관한 기사를 접할 때마다 스트라스부르에서의 일화가 떠올랐다. 녀석의 아니면 말고 식의 마지막 대답 'Ah...OK.'의 씁쓸한 뒷맛이 꽤 강렬해 여행에세이에서 썰을 풀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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