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ernweh Feb 18. 2022

읽히지 못하는 필명

단상(32) 페른베

 지금 이 글을 적고 있는 브런치에 띄우는 필명은 바로 '페른베'(Fernweh)다. 일단 우리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글로 적혔어도 바로 기억할 수 있는 영어도 아닌 이름. 프랑스어 강의와 번역을 하고 있으니 프랑스어로 만들 법도 했을 필명은 생뚱맞게 독일어 단어고, 처음엔 그래서 나조차도 어색했던 이름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오랜 고민 끝에 정한 필명이 아니란 게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우연한 순간이 그때는 마치 이 이름을 필명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필연처럼 느껴져서 정한 이름인데 그게 화근이었는지 지금은 읽히지 못하는 비운의 필명이 되고 말았다. 


 작년 이맘때쯤 출판 마켓에 감사한 기회가 닿아 참가하게 되었다. 내 부스에 깔 책은 여행 에세이였고, 여행 글을 썼다는 걸 어떻게든 연관 짓고자 그에 걸맞은 필명을 지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더랬다. 마침 읽고 있던 책에 '먼 곳에 대한 동경, 그로 말미암은 여행 병(病)'이라는 뜻의 독일어 명사 '페른베'가 짜잔, 하고 내 눈앞에 등장했다. 코로나의 여파로 여행길이 뚝 끊어져 버렸던 탓에 동경에 그치는 게 아니고 병까지 불러일으킨다는 강렬한 뜻에 홀린 듯 빠져들며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단숨에 필명을 정해버렸다. 


 마켓 당일에도 '안녕하세요, 페른베입니다'라고 소개하는 게 어찌나 어색하던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페, 른, 베 또박또박 발음해도 워낙 희한해서 사람들이 되물어 볼 법한 이름인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했으니 몇 번이고 더 필명이 뭔지(심지어 'ㅓㅣ'인지 'ㅏㅣ'인지까지 덧붙이며), 그 뜻이 뭔지, 왜 필명을 이렇게 정했는지 설명을 구구절절 이어가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며 어색하기 그지없었던 이름이 익숙해졌다. 물론 내 입에서만 말이다. 작년 10월 춘천에서 열린 출판 마켓에서 워크숍도 진행하게 되어 홍보용 배너에 이름이 달렸는데, 거기엔 페른베는 없었다. '베픈베'가 있었다. 처음 발견했을 때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워낙 요상한 조합으로의 오타였기에 담당자에게 사과의 의미가 담긴 커피 한 잔을 얻어먹고 유쾌한 해프닝으로 넘겼다. 다른 글을 쓰면서 가끔 가다 일전에 냈던 여행 에세이를 홍보해 본답시고 '페른베라는 작가가 쓴 <말을 모으는 여행기>라는 책에...' 따위의 문장을 쓴 적도 있다.(얼떨결에 책을 언급하며 여기서도 홍보를...) 맞춤법 검사를 했더니 웬걸, '페른베'에 버젓이 오류 표시가 되어 있고 '퍼런 베'라고 수정하란다. 차라리 '푸른 배' 같은 게 나왔으면 상큼한 기분이라도 났으려나. 퍼렇게 물든 무명실(베)이 된 것 같아 실없는 기분이 들었다.




 베픈베와 퍼런 베. 여기서 끝날 줄 알았는데, 친구 녀석에게서 날아든 카톡에 숨겨진 메시지는 '끝난 줄 알았지? 였다. 내 책을 사준 친구라서(읽었는지 어쨌는지는 둘째 치고) 귀인처럼 여겼건만, 날 '프렌ㅂ' 라고 호명했다. 마지막에 모음을 살포시 하나 더 얹는 성의는 어디로 갔을까. 그러니 책장에 꽂힌 책을 다시 뽑아가면서까지 정확한 필명이 뭐였는지 살펴보는 성의는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차라리 낯 간지럽더라도 '프렌드'로 부르는 게 더 나았을지도...


얼마 전, 책 사러 갔다가 얼떨결에 책방 팟캐스트에 게스트로 출연하게 됐는데 그때 녹음한 이야기가 업데이트되었다는 소식을 받았다. 분명 내 기억엔 내가, 그러니까 '페른베'가 게스트로 참석했는데 다른 이의 이름이 올라있었다. '페르베'라는 게스트가. 물론 이번 건은 사소하고 단순한 오타란 게 딱 보였고, 담당자가 바로 수정해주긴 했지만 끊이지 않고 필명이 잘못 쓰이는 상황을 마주하니 필명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고야 말았다. 


제대로 읽히지 못하고 쓰이지 못하는 비운의 필명 '페른베', 이제는 제대로 읽히고 쓰이길 바라는 마음에 쓱- 몇 자 적어 보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띄우느냐 붙이느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