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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Mar 03. 2022

콧물을 흘리는 마음으로

단상(33)

글을 읽기 전, 우선 노래를 틀자. 김광석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그렇다, 이 글의 제목은 저 노래 제목을 따다가 지었다. 잔잔한 선율 위로 살포시 얹어진 김광석의 목소리가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부르지만 애써 그 애달픈 가사를 '콧물을 흘리는 마음으로' 따위의 가사로 덮어버렸다. 속으로 '잊어야 한다는'이라고 불렀든, '콧물을 흘리는'이라고 불렀든 운은 띄워졌으니 본론으로 넘어가 보겠다.


요즘 도통 집중이 잘 안 된다. 잘 이어지던 의식의 흐름 사이로 또 다른 흐름이 끼어들면 집중이 흐트러져 버린다. 여러 종류의 일이 섞여 들어오는 N잡러의 숙명이라고 해야 할까. 강의 교안을 만들던 중 용법 확인 차 네이버 사전에 접속한다. 같은 플랫폼의 메일을 쓰는 탓에 사전 화면 상단의 메일 아이콘에 붙은, 새 메일이 한 통 왔다는 알림인 '1' 표시가 눈에 들어온다. 메일 아이콘을 클릭하는 순간 용법 확인차 사전 창을 띄웠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는다. 번역 업무 관련 메일이 와 있다. 요청사항 확인 후 번역 업무 폴더를 열려고 바탕화면으로 돌아가려다 띄워 둔 사전 창이 눈에 들어온다. 그제야 교안을 만들던 중이었단 걸 깨닫는다.


이런 식이다. N잡러의 숙명이라는 그럴싸한 단어를 갖다 붙였지만 어딘가 번지르르하기만 한 기시감이 든다. 전에는 이런 적이 잘 없었기 때문. 오히려 하던 일을 끝내기 전까진 과하게 다른 일을 무시할 정도였으니, 행동이 쉽게 분산되고 마는 요즘의 습관이 퍽 신경 쓰이는 것이다. 꼭 일에 국한된 게 아니라 책을 읽다가도 핸드폰이 시야에 잡히면 폰으로 뭘 꼭 봐야 하는 것도 아닌데 책을 덮고 애꿎은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기도 한다.


갈팡질팡 대는 집중력을 끌어올리려고 예전에 어떻게 마음가짐을 다졌는지 떠올리다가 주르륵 흐른 한 줄기의 콧물이 떠올랐다. 코로나 감염 증상의 하나로도 비칠 수 있는 이 증상을 하필 코시국에 입에 담으려니 께름칙하다만, 코로나는커녕 메르스도 에볼라도 출현하지 않았던 옛날 옛적의 이야기니 방역에의 긴장감은 살포시 내려놓고 글을 읽어도 좋겠다.


고3 때 음대 입시를 보았다.(너무 뜬금없죠...) 음대에 가려던 건 음악에 재능이 있어서도, 음악을 하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혈기왕성한 한 남아가 학업에만 칭칭 옭아매는 입시 시스템이 지긋지긋해서 거기서 조금이나마 벗어나려고 부린 객기였다. 객기인 걸 깨달았을 땐 너무 늦었다. 이미 예체능 입시에 최적화된 과목만 수능 시험 과목으로 신청한 후였다. 인문/상경대에 원서를 넣고 싶어도 전형이 요하는 과목(예를 들어, 수리 영역 같은) 점수가 없으니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낙장불입'의 신세, 음대에 미련이 없는데 일단 원서는 넣어야겠고, 레슨은 받았으니 실기 시험은 한 번 봐보자는 마음이었다.


저런 흐리멍덩한 마음으로 시험을 치러 갔으니 신분증 정도는 놓고 가줘야 이야기의 맥락이 맞을 터. 감독관을 따라 시험 통제실로 쪼르르 가서 주민번호와 이름을 큼지막하게 적은 A4 용지를 가슴팍 앞에 쳐들고 인증숏을 찍어야 했다. 범죄자가 수감 전 죄수 프로필 사진을 찍듯이 말이다. 아침 댓바람부터 부모님이 내 신분증을 들고 시험장까지 와야 한 건 덤이었고.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서 대기실로 향했다. 여전히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라는 듯 대기실은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실기 시험은 한겨울에 치러진다. 찬 공기를 헤치고 들어선 고사장에서 몸을 녹일 새도 없이 놓고 온 신분증 때문에 이리저리 끌려 다녔고, 겨우 들어선 대기실은 따뜻했지만 한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차례가 돼서 피아노 실기실로 이동해야 했다. 애매한 상태로 녹다가 만 혈류 속 체온이 끝내 생체학적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미처 데워지지 않은 일말의 한기를 녹여내며 만들어진 콧물은 입시곡이었던 월광 소나타 3악장의 16마디를 지날 즈음 콧구멍 바깥으로 서서히 흘러나왔다. 연주는 빠른 템포로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기에 흐르는 콧물을 재빨리 닦아 낼 찰나도 허락하지 않았다. 반쯤 포기한 상태로 치른 실기 시험이지만, 콧물이 흐르는 모습이 심사 중인 교수들에게 좋게 보일 리 만무하지만, 중요한 건 마음가짐도, 보이는 이미지도 아니었다. 피아노 연주를 제대로 끝마치는 게 중요했다. 흐르는 콧물을 잊은 채 오롯이 연주에만 집중했다.


합격했다면 흐르는 콧물을 개의치 않고 연주를 해내 끝내 우리 대학에 입학했다는 그럴싸한 무용담이라도 남았으려나. 어차피 떨어질 시험, 콧물이라도 닦아 깔끔한 인상을 남기고 오는 게 더 나았을까. (이미 신분증 놓고 왔으니 엉망진창인 이미지였겠지만) 벌써 십 년도 훌쩍 더 된 이야기라 어떠한 이미지로 기억이 되든 지금으로선 전혀 상관없는 사소한 해프닝 따위가 되어 버렸다. 전락해버린 그런 이미지 말고, 기억하고자 하는 이미지는 콧물을 흘리면서도 피아노 연주에, 그 행동 하나에, 손가락을 분주히 움직이는 그 상황에만 집중하고 있던 모습이다. 정신이 산만해질 때면 마음을 다잡아야겠다. 콧물을 흘리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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