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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Mar 30. 2022

결말이 비극이란 걸 알고 보는 영화

단상(40) 


우선 이 글에는 현재 절찬 상영 중인 영화 <스펜서>의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음을 밝힌다. 제목에서 결말을 비극이라면서 안내도 보기 전에 무려 결말을 스포일러한 건 아니냐며 욕할지도 모르니 서둘러 변명을 하겠다. 결말이 비극이란 건 영화의 결말이 비극이라는 게 아니라 영화 속 인물인 다이애나 생의 결말이 비극이란 걸 의미한다. 


다이애나 자신의 모국인 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그녀의 삶이지만 사실 다이애나에 대하 잘 몰랐다. 그녀가 안타깝게 차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을 때도 이제 겨우 초등학생이었던 터라 그녀라는 인물, 그녀가 버텨내야 했던 왕실에서의 삶은커녕 영국이란 나라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던 시기였다. 나라 이름 '영국'이야 먼 나라 이웃나라 시리즈 중의 한 권으로 만나볼 수 있을 정도였으리라. 


그녀의 사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다이애나가 누구였으며, 왜 왕실에서 트러블 메이커였는지를 대충 알게 되었다. 자세히가 아니라 대충. <스펜서> 말고도 다이애나의 생애를 다른 콘텐츠야 이미 많았지만 딱히 챙겨 본 콘텐츠는 없어서 그저 얄팍한 상식 수준으로만 다이애나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스펜서>를 보게 된 거냐면... 바로 '여우주연상'이라는 타이틀 때문이었다.


수상작 집착증(?)이 있는 나로서는 스물몇 곳에서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는 이 영화를 놓칠 수가 없었다. 얼마 전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 직전에 영화를 봤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분명 오스카 여우주연상도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받을 거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았을 만큼 멋진 연기였다. 좋아하는 여배우를 대라면 1초의 망설임 없이 '레아 세이두'라고 말할 내가 어쩌면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레아 세이두 중에 1초 정도는 고민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끔 만들 만큼.


이번 단상은 한 배우의 연기를 논하는 자리가 아니니 이쯤에서 각설하고 본론으로 돌아오겠다. 제목에서 어그로 끌듯 달아 둔 '결말이 비극'인 그녀의 삶과 달리 영화의 결말은 희극이었다. 왕실 별장에서의 크리스마스 연휴를 끝내 다 버텨내지 못하고 그녀의 두 아들을 데리고 런던 시내로 돌아가는 장면이 영화의 결말 부분에 나온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 심지어 체중까지 기록되는, 감시당하는 삶 속 왕세자비의 모습을 떨쳐 내고 영화의 첫 장면처럼 손수 차를 몰고 해방되는 그녀의 모습이. 그녀에게서 옮아 온 해방감이 커서 영화관의 암흑을 틈타 (내적) 몸부림을 칠 정도였다. (고요한 영화관에서 소리는 칠 수 없으니까) 그런데 그 이면에는 깜깜한 영화관처럼 어두운 불안감이, 결말이 비극이란 걸 알기 때문에 생긴 불안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 네이버 영화


영화에서도 그녀를 줄곧 괴롭히던 파파라치를 피하려다 프랑스에서 차 사고로 목숨을 잃은 그녀 생의 비극적 결말은 잘 알고 있었다. 영화의 결말은 장소로도, 시간으로도 그녀 생의 결말과는 달랐다. 프랑스가 아닌 영국이었고 시기적으로도 다이애나가 아직 왕세자비일 때였으니 훨씬 이른 때였다. 희한한 건 더 이상 왕세자비가 아니고 영국이 아닌 곳에 머물 때 벌어진 비극이 영화의 결말처럼 비쳤다는 것이다. 해방감을 동력 삼아 힘차게 달리고 있는 영국의 도로 위에서 사고가 일어나기라도 할 것 같은 알 수 없는 불안이 요동쳤다. 게다가 뒷좌석엔 어린 두 아들이 앉아 있었으니 요동치는 수위는 점차 심해졌다. 그녀 삶의 비극적 결말이 어디서, 언제 일어났는지를 알고 있었음에도 영화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영화의 결말마저 비극으로 점철될 거라는 괴상한 상상력이 발현됐나 보다. 그래서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다이애나가 결혼 전 성씨인 "스펜서"를 말하는 장면마저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영화를 보며 이런 여운이 남은 건 또 처음이라 주저리주저리 몇 자 적어보았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스펜서>의 여우주연상 수상은 불발됐다. 스튜어트의 연기가 정말 훌륭했기에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제시카 차스테인의 연기는 얼마나 어마어마할지 궁금해진다.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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