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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Apr 04. 2022

숙연한 이름

단상(41)


 황망함. 딱 열 글자의 카톡에는 황망한 기운만이 가득했다. 평소엔 잘만 붙이다가도 황망한 기운에 압도된 메시지에는 모음마저 떨어져 나간 'ㅋ' 자음 하나조차 붙어서는 안 됐다. 나도 친구들도 갑자기 이게 뭔 일이냐는 대답을 툭 던졌지만, 황망함에 휩싸인 발신자 친구는 꽤 오랜 시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으리라.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에게서 답장이 왔다. 이번엔 열 글자의 텍스트가 아닌 링크였다. 링크를 누르자 자세한 부고 안내가 적힌 모바일 알림장이 화면에 떴다. 황망함을 느낀 열 글자의 메시지에서처럼 딱 부고 알림만큼의 정보 말고는 납득할 수 있는 그 어떤 형태의 설명도 드러나지 않은 알림장이었다.


 상주가 되기에 아직은 이른 삼십 대의 우리는 이른 줄도 모르고 상주가 되어 버린 친구에게 무언의 시선으로 서툴게 위로를 보냈다. 서툰 그 여백은 뒤편에서 흘러들어온 누군가의 통곡 소리로 간헐적으로 채워졌다. 이내 통곡으로 채워져 버리면 상주인 친구의 마음도 우리의 마음도 와르르 무너져 버릴 것 같았는지 더 서툴게 뱉어낸 음성으로, 제스처로 친구를 위로했다. '괜찮냐'라고 물었다가, 말없이 시선을 떨구며 그에게 다가가 등을 몇 번 쓰다듬어 주었다가 하면서. 


 조문을 마치고 다른 조문객을 맞이하는 친구를 뒤로 하고 자리를 잡아 앉았다. 조문객이 뜸해진 틈을 타 우리가 곁으로 터덜터덜 상주 친구가 찾아왔다. 앉자마자 소주를 한 병 따더니 따라주려는 우리의 손길도 마다하고 한 잔을 따라 입에 바로 털어 넣었다. 밥은 먹었냐는 말에,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는 말에 자신이 지금 밥 먹을 정신이겠냐고, 술을 안 먹고 버틸 정신이겠냐고 털어놓는 그였다. 엄습한 슬픔을 애써 날려 보내려고 시답잖은 농담도 먼저 건넨다. 마치 우리가 모일 때면 삼십 대의 점잔 빼는 모습을 잊고 철없는 고등학생 때처럼 행동하던 걸 상기시키라도 하듯이. 


 다시 조문객을 맞이하러 자리를 떴던 친구는 우리 뒷 테이블에 우리는 모르는 다른 친구에게 와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러 갔다. 상주 친구가 꺼내고 간 시답잖은 농담에 시답잖았던 옛 에피소드를 하나씩 이어 붙이던 와중에 희미하게 내 이름을 들었다. 이윽고 또렷하게 내 이름이 들렸다. 뒷 테이블에 있던 상주 친구에게서 발성된 내 이름이. 친구는 거기서도 한 잔 하려는 듯 우리 테이블에 놓인 잔과 수저를 좀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에게서 불린 이름은 어딘가 숙연하게 귓가에 남겨졌다. 그들을 만나면 행동만 고등학생 때로 회귀하는 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사회에선 점잖게 불리던 이름, 그러니까 본명은 그들 앞에만 서면 십여 년도 전에 불리던 해괴망측한 별명으로 탈바꿈했다. 지금까지 줄곧 만날 때든 전화 통화할 때든 카톡을 보낼 때든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철없던 시절을 온몸으로 울부짖는 해괴망측한 별명으로 불렀다. 여자끼리라면 옛 동창에게 다정하게 이름 정도는 불러줄 수도 있겠지만 남고를 나온 터라 우리 중 누구도 다정함을 생동케 할 XX염색체를 가진 자는 없었다.


 슬픔에 압도당하지 않으려고 어설픈 농담을 꺼냈던 상주 친구도 이름만큼은 진중하게 불러야 한다고 느낀 자리였으리라. 있는 그대로의 이름을 부른 그의 음성에는 이후로 쭉 감당해야 할, 그러나 쉽게 감당하지 못할 비애가 담겨 있었다. 장례식장을 나오고 나서도 오래도록 내 이름에 숙연함이 배어 있음을 느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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