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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Apr 05. 2022

소리 없는 대사가 남긴 여운

단상(42) 

  <드라이브 마이 카>.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소설은 이미 읽었다. 꽤 오래전이라 읽었던 기억만 나는 건 아쉬웠다. 그나마 영화를 보면서 미사키가 가후쿠의 차를 대신 운전한다는 설정과 두 인물에게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는 정도만 겨우 떠올랐을 뿐이다. 입소문을 타며 7만 관객을 돌파한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원작 소설에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 제대로 기억도 못하는 나 역시도 원작과는 별개로 이 영화가 괜히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은 게 아니란 걸 절절히 실감했을 만큼 잘 만들어진, 그러니까 '웰메이드' 영화 그 자체였다.

ⓒ 네이버 영화

*아래부터는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드라이브 마이 카>를 다시 읽었다. (국내에는 하루키의 단편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되어 있다) 영화를 볼 때 가물가물하게 떠오른 소설 속 설정이 이번에는 뚜렷한 발자취를 기억에 남겼다. 이전에 가물가물했던 이유가 소설에선 영화처럼 장황한 플롯으로 그 설정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알려주는 정도에 그치는 설정. 연극배우인 주인공 가후쿠가 안톤 체호프의 연극 <바냐 아저씨>에 출현했다거나 가후쿠의 부인 오토가 바람을 피운다는 내용 등은 소설에선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playlist♬ 우타다 히카루, Flavor of Life


 영화로 옮겨지며 <바냐 아저씨> 출연 이야기는 영화 속 두 개의 주요 플롯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제목만 봐서는 어리지만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아온 미사키가 신체적으로는 서서히 진행되고 있던 녹내장으로, 심리적으로는 부인의 외도를 알고 난 후 무대에서 과몰입하는 현상으로 무너져 가는 가후쿠를 대신하여 운전해주는 플롯이 메인 플롯처럼 느껴진다. 어딘가로 향하며 나아가는 운전을 타인이 해준다는 건 정체된 상태의 누군가를 끌어준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의미심장한 메시지까지 느꼈는데, 여운으로 남은 건 메인이 아닌 서브플롯, 그러니까 극 중의 극, <바냐 아저씨>를 무대에 세우는 플롯이었다. 


 '히로시마 국제 연극제'에 오르게 된 <바냐 아저씨>의 연출을 가후쿠가 맡게 된다. 국제 연극제의 특성상 출연진은 다국적이었다. 홍콩, 필리핀, 일본, 한국에서 온 배우들이 각자의 모국어로 각자의 대사를 읊조린다. 상대가 대사를 이해할 수 없으니 연습하는 장면에선 배우들이 대사를 마친 후 주먹으로 책상을 툭 두드리며 대사가 끝났음을 알려줘야 했다. 영화 속 연극제에서도 무대에 올리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느껴질 만큼 준비과정은 녹록지 않아 보였다. '소냐' 역을 맡은 배우는 심지어 대사를 수어로 전달한다는 설정이었으니까. 앞선 다른 배우의 언어는 언어 자체는 다르지만 음성 언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런데 영화 속 '소냐'의 대사는 다른 언어라는 사실에 음성 언어가 아니라는 특이점까지 더해졌다. 


수어로 '소냐'를 연기한 이유나 역의 한국 배의 박유림 ⓒ 네이버 영화


 주인공 '바냐' 역을 맡기로 한 배우가 폭행치사로 경찰에 체포되며 상연 여부가 미궁에 빠져 버린다. 부인(심지어 그녀는 영화 중반 사망한다)의 외도로 더 이상 무대에 오를 수 없는 가후쿠가 '바냐' 역을 다시 맡지 않는 이상 연극은 취소될 위기에 처한다. 배역을 맡을지 결정할 유예 기간 동안 미사키가 운전하는 차에 몸을 싣고 둘은 미사키의 고향인 홋카이도에, 어머니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다녀온다. 히로시마에서 북으로 거슬러 오르는 이 장면은 꽤 길게 영화에 담겼고, 별다른 부연 설명 없이 전환된 장면에선 '바냐'로 분장한 무대 위의 가후쿠가 보인다. 그리고 그의 뒤에서 '소냐'가 수어로 <바냐 아저씨>의 마지막 대사를 전한다. 운전 장면에 비해 짧게 담긴 엔딩 씬이지만, 마지막 수어 대사의 여운만큼은 무척 길었다. <드라이브 마이 카> 속 <바냐 아저씨>의 연출 과정이 더 뚜렷하게 하나의 플롯으로 담겼다고 느꼈던 것처럼.


 그 여운이 달아나버리기 전에 이번엔 연극의 원작 <바냐 아저씨>를 읽었다. 영화에선 연출 과정에 포커스를 뒀기에 정작 <바냐 아저씨>가 무슨 내용인지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물론 차에서 상대역 대사가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틀고 가후쿠가 대사 연습을 하는 장면이 계속 나왔지만, 대사 연습 장면만으로 원작 내용을 파악하긴 어려웠다) 일상을 간단명료한 문체로 잘 옮겨냈다고 평을 받는 안톤 체호프의 작품이라 그런지 술술 읽혔다. 오랜만에 희곡을 읽는 게 재미있기도 했고. 어느덧 결말에 이르렀을 때 영화가 짙게 남긴 여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책, 그러니까 텍스트로 읽는 소냐의 마지막 대사는 '소냐'의 수어, 그러니까 수어를 모르는 나는 자막으로만 볼 수 있었던 그 대사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이 대사를 소리로 들었다면 영화를 보고 나서 얼마 동안이나 제대로 기억할 수 있었을까? 자막으로 단어 하나하나를 눈에 담아내야 했던 수어였기에 남길 수 있었던 여운이리라. 자막으로 고작 한 번 본 대사를 외웠다는 의미가 아니고, 소리가 아닌 텍스트로 받아들인 대사라 책에서 다시 그 대사를 봤을 때 소리 없이 펼쳐지는 수어 연기 장면이, 그 여운이 떠올랐다는 말이다.


 +) <드라이브 마이 카> 영화를 재밌게 보신 분들이라면, 하루키의 원작 소설과 체호프의 원작 희곡도 같이 읽어 보면 좋을 듯하다 :)


playlist♬ 박기영, DEAR


바냐 아저씨 사는 거예요. 길고 긴 낮과 오랜 밤들을 살아 나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주는 시련들을 참아 내요. 지금도, 늙은 후에도, 쉬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해요. 그리고 우리의 시간이 찾아와, 조용히 죽어
무덤에 가면 얘기해요.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울었는지, 얼마나 괴로웠는지.
하느님이 가엾게 여기시겠죠. 우리는, 아저씨, 사랑하는 아저씨, 밝고 아름답고
우아한 삶을 보게 될 거예요. 우리는 기뻐하며, 지금 이 불행을, 감격에 젖어
미소를 띠며 돌아보겠죠. 그리고 쉬는 거예요. 나는 믿어요, 아저씨.
나는 뜨겁게, 간절히 믿어요. 우리는 쉬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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