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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연 Apr 08. 2024

함께 걷기: 수많은 인파와 함께, 석촌호수

시작이 버거운 이들에게





4월의 첫 주, 벚나무 가지마다 분홍빛 꽃이 폈다. 찬바람이 채 가시지 않은 때에도 나무는 부지런히 봄을 준비했고, 예상한 개화 시기보다 조금 늦게, 그렇지만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겨우내 비어 있던 가지 끝에 피어난 벚꽃은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고, 사람들은 홀린 듯 나무 아래서 걸음을 멈춘다. 


개나리와 목련, 벚꽃이 피어나는 봄의 시작에서 서점 아르바이트를 그만뒀다. 아르바이트를 관둔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봄이 왔기 때문. 피부를 스치는 바람에서 조금씩 따듯함을 느낄 때, 손등을 덮으려 끌어내린 소매를 손목 위로 걷어붙일 때, 아침 출근길에 조금 덥다는 느낌이 들 때,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다짐했다. 퇴사를 마음먹고 한동안 마음이 뒤숭숭했지만, 지금만큼이나 괜찮은 하루가 펼쳐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와 확신이 마음 한 구석에서 조용히 피어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유도 없고, 갈 곳이 정해진 것도 아니지만, 어쩐지 괜찮은 내일이 펼쳐질 것만 같았다. 


한창 벚꽃이 피는 때인 만큼 나를 보기 위해 엄마와 언니가 서울에 놀러 왔다. 혼자 혹은 연인과 함께 걷던 길을 가족과 걸으니 신기하면서도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벚꽃과 함께 사진 찍기 위해 줄 선 사람들 틈에서 나는, 엄마와 언니를 위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내 사진은 찍지 않아도 되지만 엄마와 언니의 사진은 잘 찍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안고서. 호수를 가득 채운 사람들 틈에서 카메라를 꺼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먼 길 온 엄마와 언니를 위해 사람들 속을 비집으며 카메라를 들었다. 소중한 이를 위해 몸을 바삐 움직이는 건 정신없는 와중에도 웃음이 끊이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게 엄마와 언니는 사람들 속에서 벚꽃과 함께 사진을 찍었고,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엄마와 언니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비록 벚꽃보다 사람이 더 많은 지금일지라도.



활짝 피었다, 벚꽃


인파 속을 빠져나와 느리게 걸으며 봄이 주는 감각이 더 이상 싫지 않다고 언니에게 말했다. 내 말에 언니는 자신 역시 그렇다고 맞장구치며 모든 게 새롭게 시작되는 봄이 버거웠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의 나와 언니는 익숙한 장소, 사람을 벗어나면 눈물부터 흘렸다. 누군가 인사하면 엄마 뒤에 숨고, 새 학기가 시작되면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눈 굴리던 우리. 새로운 모든 것에 낯가렸던 우리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낯섦에 적응하는 어른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어린 우리가 남아있었다. 마음속에 남은 어린 우리는 주로 봄에 제 모습을 드러냈고, 새로운 환경과 사람에 적응해야 할 때면 몸집을 더욱 크게 부풀렸다. 봄만 되면 커지던 어린 우리는 어느 틈엔가 다시 작아졌고, 지금은 새로운 시작이 그리 두렵지 않다고 나는 언니에게 말했다. 정확한 시기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아이는 예전보다 작아졌다고. 언젠가부터 나는 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봄에 태어난 우리가 봄을 버거워하며 여러 해의 봄을 보낼 때, 봄을 기대하는 한 아이 역시 우리 마음속에 있었던 게 아닐까, 언니와 대화하며 그런 결론을 내렸다. 봄을 두려워한 시간만큼 봄을 기대했던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 거라고. 시작은 사실 그리 거대한 게 아니라는 것도.


불어오는 봄바람에 가슴을 펴본다. 겨우내 웅크렸던 나무가 푸르게 피어나듯 움츠렸던 마음을 부드럽게 편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걸 두려워했던 우리는 어느새 봄에 피어나는 꽃을 보며 환하게 웃는 어른이 되었다. 봄을 기대하는 아이가 가슴을 펴고 일어나기까지 이십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 아이는 기죽지 않았다. 다만 지금이 가슴을 펼 때라는 듯, 자연스럽게 숨을 내쉰다. 


혼자 걸으면 알지 못했을 마음을 엄마, 언니와 함께 걸으며 알게 된다. 어린 내가 두려워한 건 봄이 아니라 새로움을 향한 시작이었음을, 그리고 지금의 내가 기대하는 건 새롭게 펼쳐질 나의 내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신기한 날이다. 알 수 없는 마음이다. 동시에 행복한 지금이다.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를 믿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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