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지로 떠나는 낭만여객선> 2부

2012년 작

by 낭만기사

<2부>


“마음에 드는 남자가 나타나면 얼른 이 약을 먹여버릴 거 에요. 히힛. 근데 당신은 입고 있는 티셔츠부터 얼른 ‘돌체 앤 바나나’로 갈아입어야 할 것 같네요.”


조소를 피우며 그녀는 빨간 색 봉지를 내밀었다. 그 봉지에는 ‘현실감각’이라 적혀있었다. ‘골드미스’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그는 이상하게시리 이 사람들이 약물을 써도 딱히 좋은 결과는 얻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얼른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래서야 자신의 계획도 신뢰가 떨어지는 꼴이 아닌가.


세 번째로 찾아갈 사람은 주소가 없고, 대신에 핸드폰 번호만이 적혀있었다. K가 전화를 걸어보니 시끄러운 음악소리 가운데 세 번째 사람이 받았다.


“아하,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여긴 시내 중심부에 있는 클럽 ‘엠비 아웃’인데 그 옆에 있는 편의점에서 만나기로 하죠, 하하”


유쾌하게 웃는 세 번째 사람의 정보를 보니, 집이 없이 혼자 사는 여자들의 집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작업꾼이라고 적혀있었다. K가 난생 처음 보는 선수였다. 이런 사람이 약 따위가 정말 필요할까 싶었다. 저녁 늦게 서야 편의점 앞에서 만난 그는, 삐까번쩍한 구두와 양복에, 현란한 포즈로 K를 맞이했다.


“제가 지금은 아는 여자 집에 잠깐 얹혀살고 있거든요. 거기에 K씨가 원하는 게 있으니 걸어가면서 이야기하도록 하죠.”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K와 함께 유흥가를 지나갔다. 주변엔 온통 짧은 치마의 여성들이 돌아다니는데, ‘작업꾼’은 K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 여자들에게 다가가 몇마디 건내고는 전화번호를 얻어오는 것이었다.


“참 대단하시네요.”


K가 놀라워하며 말을 이어갔다.


“이런 능력은 저도 좀 알려 주시는 게 어때요?”

“하하 원하신다면야, 그런데 행복은 보장 못해드립니다. 이렇게 여자를 만나도, 금방 헤어져버리는 게 제 징크스거든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약간은 허무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래도 그렇게 여성을 많이 만나는 건 모든 남성들의 로망 아닙니까.”

"아니에요. 더욱 중요한 건 어떤 여자도 내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죠. 전 그냥 아예 제게 홀딱 빠진 여자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다른 여자를 만나면서도 저만 바라봐주면 좋겠는데, 그런 여자를 만나기기가 쉽지 않아요,"


사실 K가 보기에 그는 유흥생활부터 끊어야 할 것 같았지만, 일일이 말해도 들을 것 같진 않았다. 이야기를 하면서 어느새, ‘작업꾼’이 얹혀산다는 여자네 집 앞에 도착했다. 자기 집도 아니면서 열쇠를 가지고 집에 들어간 그는 하얀색 봉투를 K에게 내밀었다.


“전 그 약을 가지고 빨리 클럽에 가봐야겠어요. 오늘은 불타는 금요일인데, 그냥 보낼 수 없잖아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종종걸음으로 유흥가를 향해 걸음을 내달았다. K가 받은 그 봉투에는 희미하게 ‘지조’라는 글자가 써져있었다.


네 번째로 그가 찾아간 집은 어떤 아저씨네 가정집이었다. 남도사투리를 구사하는 40대의 쾌쾌한 아저씨였다. 그가 쓴 안경은 먼지하나 없이 닦여있어 깐깐한 인상을 주었는데, 주머니에는 망원경이 하나 꽂혀있었다.


“아따, 우리 마누라가 집에 오는디 10분이나 늦는다네? 씨방 이거 다른 놈팽이를 만나는거 아닌가 몰러.”


그는 그렇게 말하며 안방에 있는 도청기를 보여줬다.


“집 안에 도청기까지 설치하시다니, 누가 보면 첩보요원인 줄 알겠어요.”


K가 놀라워하며 말했다.


“당췌 마누라를 믿을 수가 있어야지. 저번에도 슈퍼마켓 직원이랑 이십분이나 이야기하길래 그 노무 자식을 아주 흠씬 패줬제, 근디 알고 본께 고교 전화 동창이라는 것이여, 그까짓 거 내가 알게 뭐냐, 음흉한 동창 놈이 뒤늦게 수작이라도 부리는지 어찌 알어!”


그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기 밑에 설치한 도청기를 확인하였다. K가 가져온 종이를 다시보니, 그는 아내를 두들겨 팬 경력도 있는 심각한 의처증 환자였다.


“그럼 ‘러브 픽션’을 구하신 이유가….”

“이런 거라도 먹어야 아내가 딴 데 눈을 안 돌리제, 니네 아버지는 이게 약효가 언제까지라고도 안알려줬는디, 효과없는거 아닌가 모르것다!”


K는 ‘신천지로 떠나는 낭만여객선’이라고 이름붙인 이 여정 중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기괴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정말 사랑에 있어선 하나씩은 결여된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었다.


‘의처증’ 아저씨는 안 쓰는 주전자 안에 숨겨둔 봉지를 가져왔다.


“이 안에 든 게 내가 받은 이파리인데, 자네한테 줄 준 몰랐구만, 잘 써서 자네 사람도 바람 안 피게 잘 관리하게잉!”


그 아저씨는 충고를 마치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K가 받은 노란색 봉지 겉면엔 ‘믿음’이라는 글자가 반 쯤 지워진 채 적혀있었다.


K는 고민했다. 과연 사랑이라는 것이 있기나 한 걸까. 그가 돌아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욕심과 집착에 매몰되어 있을 뿐이었다.


사실은 자기 안에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을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스스로가 먼저 바로 설 수 있는 인간이어야 할 것이다.


다섯 번째 사람은 이십여 번이 넘도록 자살을 시도한 청년이었다. 종이에 적힌 바에 따르면, 그는 하나 뿐인 아내를 잃고, 실의에 빠져 직장도 때려치고선 식음을 전폐한 지 벌써 일 년이 넘었다고 한다.


거지도 안 살 것 같은 고시원 방이었다. K는 가까스로 찾아간 그 청년의 거처에 도착했다. 방 안에 들어선 순간 K는 기겁을 하고 그 청년을 일으켰다. 청년은 면도칼로 손목을 긋고 쓰러져 있었다. 간단한 응급처치를 한 K는 그를 들쳐업고 가까운 종합병원에 안치시켰다.


두어시간 뒤에 청년은 가까스로 깨어났다. K를 발견하자마자 청년은 대뜸 원망의 소리를 늘어놨다.


“이런 제길! 이번에야 말로 확실하게 뒈져버릴 수 있는 기회였는데…. 왜 절 구한거죠? 차라리 죽게 내버려둬요!”


K가 노려보며 말했다.


“죽어가는 사람을 어떻게 그냥 둬요? 회사에서 받은 약으로 다른 여자를 만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이미 죽은 사람, 그냥 보내줄 수 있는 거잖아요.”


하지만 청년은 악바리같이 소리 질렀다.


“ 헛소리 마세요. 전 그녀 없으면… 그녀가 없으면 살 수가 없어요. 도대체 그녀 없는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죠? 함께 했던 추억도, 같이 나눴던 달콤한 이야기도 다 사라졌어요. 전 반쪽을 잃었다구요.”


K는 소리 지르는 청년을 보며, 처음 J와 헤어졌던 순간의 자신과 미묘하게 닮았음을 느꼈다. 그녀가 없으면 모든 게 허무했던 순간, 그는 그녀를 얼마나 바랬던가.


하지만 K는 사람들을 만나오면서 그 자신의 욕망과 문제를 조절하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달아 가기 시작했다. 그는 이전의, 자립심 없고 그녀에게 매달리기만 하고, 현실감도 없이 백수생활에 만족하던 그가 아니었다. 이윽고 K가 반박했다.


“과연, 생각해봐요, 당신의 그런 모습을 죽은 당신의 아내가 보면 뭐라 생각할까요? 그녀없이도 잘 지내면서 꿋꿋한 모습을 보이는 게 죽은 아내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모습 아닌가요?”


청년은 오열하고 있었지만, K는 멈추지 않고 말했다.


“그녀 없이도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 먼저 되세요. 아무래도 당신은 스스로 바로서는 게 먼저인 거 같네요.”


청년의 멱살을 잡은 그의 눈에 청년의 자켓 속주머니에 든 푸른 공병이 보였다. ‘러브 픽션’이었다.


“일단 이거부터 들이켜요, 그리고 다른 사람을 찾아요.”

“…제가 그렇게 해도 그녀가 절 용서할까요.”


청년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히, 그녀는 자랑스러워 할 겁니다. 이렇게 멋진 남자를 만났다고.”


청년은 담담하게 말하는 K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그가 가진 푸른 약병을 내밀었다.


“이거… 가지세요. 아무래도 당신 말대로, 일단 전 제 자신을 추스르는 게 먼저겠네요. 전 부러워요. 그렇게 굳건한 마음이라면, 이 약이 필요없을 지도 몰라요. 전 K씨가 찾는 이파리를 잃어버렸어요. 술을 마신 날 홧김에 집에 불을 질렀죠. 그래서 고시원에 살고 있구요….”


“그렇다 해도 ‘러브 픽션’이 있는데, 이걸 이렇게 선뜻 제게 줘도 되는 건가요?”

“상관없어요. 전 당분간 고향에 내려갈 겁니다. K씨는 그 약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붙잡으세요.”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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