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작
<신천지로 떠나는 낭만여객선>
K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눈 앞에 서 있는 J의 모습은 어제까지 그가 알던 J가 아니었다. 봄바람처럼 따사하기만 했던 J는 온데간데없고, 꽁꽁 얼은 시장의 동태와 같은 그녀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우리 이제 그만 만나…. 미안해.”
K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조금 오래 백수이긴 했지만, 부모님도 부유한 편이었고, 꽤 착실히 그녀만을 바라봤다. 물론 최근에 술을 먹으면 그녀에게 전화해서 고래고래 신세타령을 하긴 했지만, 연인이라면 그 정돈 받아줄 수 있는 거 아닌가? 그의 상식 상, 남자가 이렇게 헌신하고 사랑했음 이런 일은 없어야 한다.
“다시 한 번 생각해 줄 수 없겠어? 내가 너무 힘들 것 같아.”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매몰차게 대꾸했다.
“오빠를 만나는 거,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 그 동안의 마음이, 다 사라졌어. 이제, 끝내자.”
K가 울먹거리며 말해도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지막 말을 마치고 그녀는 돌아섰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다만 쓸쓸한 벚꽃만이 흩날린다. 요즘에는 ‘허스커허스커’라는 밴드의 ‘사쿠라엔딩’이란 유행가가 잘 나간다는데, 그의 얼굴에 닿는 꽃잎은 베드엔딩을 말하는 듯하다.
쓸쓸히 집으로 돌아온 K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와 함께했던 나날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흘렀다. 꿈에서도 나오고, 깨어있어도 생각나고, 그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렇게 몇날 며칠이 흘렀다. 일주일 뒤 어느 달밤,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다 귀신에 홀린 것처럼 일어난 그는,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지만 우유는 유통기한이 지나있었다.
“우웩”
K는 그 자리에서 우유를 뱉었다. 엎친 데 덮치는 세상이다. 한심한 표정으로 토사물을 바라보는 그는, 마치 상한 우유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처럼 보였다. 그렇게 그는 지친 표정으로 베란다로 향했다. 창 밖으로 새하얀 보름달이 그를 놀리듯 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을 보며 비웃는 J의 모습 같아서, K는 보름달을 향해 주먹을 뻗어댔다. 하지만 생판 모르는 남이 보기엔, 달밤에 체조하는 미친놈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달밤 아래 춤을 추다가, K는 아버지가 아끼던 화분을 넘어뜨렸다. 그 화초는 제약회사 상임연구원으로 있는 그의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화초 중 하나였다.
K가 슬그머니 베란다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는 찰나였다.
“너 이놈! 거기 그 자세로 멈추거라!”
어디선가 야차의 속삭임 같은 굵은 울림이 났다. 안방 문 안쪽에서였다. 그의 아버지였다. K는 꽁꽁 얼은 시장 동태처럼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백수인 그에게 이제 용돈은 없다. 만화책을 볼 수도, 맥주 한 캔을 홀짝일 수도 없을 것이다.
한심한 오늘 하루가 이렇게 마감되는구나 싶은 차에, 아버지가 말했다.
“남자 녀석이 쯧쯧, 아까부터 보고 있었다만, 이 밤에 뭐하는 짓이냐!”
“아, 아버지!”
K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난감했다. 이런 부끄러운 꼴이라니….
“남자 녀석이 심란하면 잠이나 자야지, 무슨 일인지 말해 보거라.”
“음…. 여자 친구에게 차였습니다. 일주일전에 말이죠.”
K는 머뭇거리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버지는 그 모습을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한마디 하였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빨리빨리 해결해야 할 텐데…. 사내가 여자문제로 고민하는 것처럼 꼴사나운 일이 없단다. ”
“하지만 아버지, 제가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이제 와서 어떻게 절 다시 사랑하겠어요.”
K는 낙담하며 말했다. 아버지는 그의 말에, 뭐가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흠…. 한번 뭐든지 해볼 자신이 있느냐?”
“…뭐든지라, 무슨 말씀이신지?”
“예를 들어, 한번 사랑에 빠지는 약이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느냐. 허허”
K는 영문을 몰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세상에 그런 게 있단 말은 처음 들어봤다. 하지만 아버지는 K가 깨뜨린 화초를 집어 들곤 말했다.
“네가 깨뜨린 이 화초는, 우리 회사에서 극비리에 만들고 있는 ‘Love fiction'이라는 약물의 재료 중 하나란다. 그 약물은 일단 한 번만 마시면 호르몬 분비를 조절하면서,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내지. 마침, 안전성 테스트까지 마쳤고, 제조법도 간단하니, 네가 한번 만들어서 써 보거라.”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볼펜을 꺼내 종이에 뭔가를 쓱쓱 적어 내려갔다. 이윽고, K에게 내민 종이에는 짤막한 조제법과 수상한 주소들이 적혀있었다. K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받았다.
“그 종이에는 그 약물을 만드는 5가지의 주재료와 조제법이 적혀있단다. 이번에 회사에서는 무작위로 5명을 뽑아서 실험인원으로 선정하고, 보상으로 화초 5가지를 하나씩 주었지. 네가 찾아가서 잎을 하나씩 받아서 직접 만들어 보거라. 효과는 내 장담하마. 하하”
K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렸다. 아마 큐피드의 화살이 존재한다면, 그의 아버지가 건네준 약물의 제조법일 것이다. 껄껄 웃으며 안방으로 들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K는 밤새 J를 되찾기 위한 프로젝트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나서, 너저분한 K의 방에는 웬 한 장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래, 이대로만 하면 되겠지, 슬슬…시작해볼까?”
주먹을 꼭 쥔 K의 앞에 있는 그 지도에는 ‘신천지로 떠나는 낭만여객선’이라는 유치한 표제가 써져있었다. 지도대로라면 계획은 이랬다. 다섯 명의 실험인원을 찾아가 약을 제조할 잎을 얻는다. 그리고 J가 자주 가던 ‘솔라벅스’란 커피숍에 잠입하여 그녀가 커피를 주문할 때, 제조한 약을 몰래 섞는다. 뭔가 참 교활하고 남자답지 못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K는 이 계획 앞에 자신의 생사를 건 것 마냥 성공을 다짐하는 것이었다.
처음 주소지를 들고 찾아간 곳은 웬 어린이집이 딸려있는 주택이었다. K가 미리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찾아간 터라 첫 번째 사람은 그를 반겨주었다. 짝사랑만 십년 넘게 하여 지원했다는 ‘마마보이’라고 적혀있는 사람이었다.
“어휴…. 나도 정상적인 사랑 좀 해보고 싶은데, 왜 자꾸 도망가나 몰라요, 엄니가 다 챙겨준대도 말이지? 하나같이 좀 만나다보면 질색을 해요. 그래서 아무래도 이건 약의 힘이라도 빌려야 할 듯해요.”
“그래서 효과는 볼 거 같나요?"
K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첫 번째 사람은 여전히 어린이나 입을법한 동물무늬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게다가 화라도 내면, 등 뒤에서 노려보는 그의 어머니가 밥주걱으로 얼굴을 갈길지도 모른다.
“써보긴 하겠는데, 그녀들 앞에 다시 설 자신이 없네요. 왠지 무섭기도 하고…. 언젠가 기회가 되겠지요? K씨야 말로 꼭 성공하길 바랄께요.”
그가 힘없이 말하며 고개를 끄떡이자, 그의 어머니가 푸른색을 띈 이파리를 가져왔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의 자유는 어머니에게 달리 모양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가져온 봉지의 겉봉에는 ‘성숙’이라고 적혀 있었다.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휘황찬란한 오피스텔이었다. 성공한 비즈니스맨이 살만한 그 곳에서 정장을 말쑥하게 입은 여자가 나왔다. 아버지가 준 종이에는 한 번도 제대로 사랑을 해보지 못한 ‘골드미스’라고 적혀 있었다.
“이렇게 벌컥 찾아오실 땐, 주스라도 한 박스 사와야 하는 거 아닌가요? 흥!”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그렇게 내뱉었다. 열심히 일하면서 보낸 젊음 치고는 너무나도 도도한 눈초리였다. 거실에 들어선 K에게 간단한 차를 내온 ‘골드미스’는 한숨을 푹 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참…. 이 나이까지 일하면서 나처럼 괜찮은 여자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다들 내 앞에서 같이 이야기를 하다보면 기가 죽네요.”
K가 물었다.
“아니, 무슨 말씀을 나누었길래 남자들이 그러던가요.”
“별 건 아니고 당연한 걸 말했을 뿐이에요. 집은 30평 이상 되는지, 학교는 스카이 정돈 나왔는지, 연애하면 일주일에 두 번은 레스토랑에서 풀코스로 먹을 수 있는 건지, 그런 당연한 걸 말해도 다들 얼굴색만 이상해지네요? 하여간 능력 없는 남자들은 매력 없어요. ”
- 2부에서
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러브픽션’이 든 푸른 공병을 K에게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