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작
<3부>
K는 그의 말을 들으며 알았다는 듯, 순순히 약병을 받았다. 그의 작은 가방에 든 ‘신천지로 떠나는 낭만여객선’이라 적힌 파일은 조금씩 헐어가고 있었다.
일주일 뒤, 그는 ‘솔라벅스’를 찾아갔다. J는 예전부터 그 곳에서 함께 그와 커피를 마시고 장난을 치면서 시간을 때우곤 했다. 가게 문에 들어선 순간, K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그와 함께 하던 그 자리엔, 그녀가 다른 남자와 함께하고 있었다. 그랬다. 미성숙했던 그를 대신해 그녀는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K는 모자를 눌러쓰고 조용히 커피숖 어딘가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았다. 지금 그의 손 안에는 청년에게서 받은 푸른 약병이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이제 이 약물을 쓰는 순간 모든 것이 종결된다. 그는 눈을 감고 그녀와 함께했던 나날을 떠올렸다. 과연 이 약물로 인해서, K는 J와 이전의 행복했던 관계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는 조용히 약병을 바라보았고 이윽고….
- 1년 뒤 -
파란 햇살이 비추는 빌딩 어딘가, 그는 회사 일을 멈추고 점심을 먹으러 회사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매일 후줄근한 티셔츠나 입고 다니던 예전의 그는 온데간데없고, 말끔한 정장에 뿔테 안경이 빛나는 그가 보였다.
마지막으로 J를 커피숍에서 본 이후 딱 일 년이 지났다. 그 사이 그는 취업에 성공했고, 새로 들어간 직장에서도 그는 책임감 있고, 유능한 신입사원으로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J를 마지막으로 본 날부터 딱 일 년이 된 바로 오늘이다.
그 날, 그는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마음을 새롭게 한 그가 한 일은, 어지럽혀진 그의 방을 깨끗이 정리하는 일이었다. 방 한구석의 쓰레기를 치우고, 바닥을 닦고, 이불을 널었다.
K는 J에게 사랑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혼자서도 행복하게 지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는 것도 많고 똑똑했지만, 분에 넘치는 대기업에 이력서를 넣었고, 면접 준비는 제대로 하지도 않는 게으른 백수였다. 하지만 눈높이에 맞춰 적당한 중소기업에 이력서를 냈고, 그 동안 관뒀던 운동과 식단조절로 나온 뱃살을 처리했다. 그의 곁엔 아무도 없었지만, 오히려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는 혼자서도 빛나는, 한 명의 당당한 성인남자가 되어 있었다.
어쩌면 ‘러브 픽션’은 그의 아버지가 만든, 아들을 위한 허구의 계략인지도 모른다. 그가 찾아갔던 다섯 명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약물을 쓰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약이 존재하기나 할까? 만일 존재한다고 하여도, 그는 그런 약물 따위에 의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가로수 길을 걸어가던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J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오랜만이야, 오빠.”
“그러게…. 잘 지냈어?”
K는 놀랐지만 담담하게 대꾸하였다. 그러자 J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응….오빠는 잘 지내 보이네?”
“보이는 대로? 음…. 나와 헤어진 뒤로 그 남자와 잘 되고 있던 거 아닌가?”
“다 봤구나?… 그 사람은, 솔직히… 오빠만큼 나만을 바라봐주지 않더라, 자꾸 오빠가 생각나서…. 미안하지만, 다시 오게 되었어….”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을 다 들은 K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정장 속주머니 않에 있는 작은 약병을 움켜쥐었다. 청년이 줬던 약이 아직 남아있었다. 일 년 전의 오늘, 그는 집으로 그냥 돌아왔다. 지금 다시, 그에게 주어진 선택의 순간이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J를 보며 말했다.
“미안해, 나 애인있어.”
그 말을 마치고 그는 돌아섰다.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그는 그의 손 안에 든 약병을 길 가의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사실 낭만여객선이 가고자 했던 신천지는 그녀가 아니라 그의 마음 속 굳건한 섬이었을 것이다. K는 J와 상관없이, 그리고 ‘러브 픽션’과도 상관없이, 그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렇게 그는 맛있는 음식냄새를 풍기는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오늘 점심을 함께 먹기로 한 그의 아버지가 웃으며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 새로 열었다는 그 식당의 간판에는 ‘러브 픽션’이라고 적혀 있었다. 은퇴한 아버지가 퇴직금으로 연 식당이었다.
- 끝 - 2012.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