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텔지어의 깃발
<출항>
'노스텔지어의 깃발'이라고 끄적혀진 깃발이 나부낀다. 맑은 달밤에 배는 출항을 앞두고 어둠 속에 잠겨있다. 뱃머리에 무인도의 등대가 걸렸다.
선장은 부둣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그는 남색모자를 썼고, 만상萬想의 그림자가 담긴 듯한 깊은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사람들에게선 경박하고,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인간 취급을 받긴 했지만, 그런 이 항구의 사람들도 은근히 그를 경외시했다.
환상적이고도 오만한 선장의 분위기에 젖어, 선장에게 말한마디 건네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웠지만 지금 아니면 또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아 용기를 냈다.
"내일 떠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가시기 전에...이곳에 미련은 없으신지..."
"... 자네는 모를 걸세, 난 머무르는 항구마다 내 마음조각들을 한 조각씩 남기지. 항해의 첫날부터 파고가 높아도, 그 조각 하나에 담긴 마음을 핑계로 출항을 명령한다네. 망할 선원들은 고생 좀 하는 편이고 말이지. "
선장은 내 물음에 순순히 답했다.
"이 항구를 휘어잡는 건달패의 여인네를 건드렸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그 건달패의 손에서 여인네를 구해놓고도, 한쪽 가슴을 검에 찔리는 중상을 당하시고도, 오히려 여인네는 겁을 먹고 먼 곳으로 도망가버렸다는데.... 그 말이 사실인지요. 외람되지만서도 충분히 대답해주실 꺼라 믿고 물어보는 겁니다."
"...그런 말을 하는 의도가 뭔가. 어차피 소설가라면 남의 상처를 후벼 세상에 전할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겠지만, 내 짧고 하찮은 이야기도 도움이 될까봐 그런건가. 훗... 한가지 충고 해주지. 떠난 배에 대고 침을 뱉어봤자, 바닷물이나 오염시킬 뿐이야. 그런 식이라면 나의 상처는 수도 없지. 그걸 어떻게 하나하나 기억하고 살아가야만 하겠나."
"매번 이런 식으로 세계의 항구를 방문해오셨다고도 들었습니다. 이 배의 이름이 Romatic passenger인 이유도 그것과 관련이 있겠죠? 선장님이 세상에 끝에 존재한다는 로맨토피아란 환상섬을 찾아 나서신다는 것도..."
"그만하게나. 달이 아름다운데 퀘퀘하게 묵은 이야기는 해서 어디 쓸까. ...뭐, 한가지 말해두자면, 낡은 고지도古地圖 한 장 믿고 이렇게 망망대해를 항해한다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야.. 나도 미쳤고 선원들도 미쳤지. 하지만 말이야. 그러면서도 하나같이 항해를 포기할 수 없는 힘이 있단 말이지. 내가 건달놈의 여자를 구해주고 보내준 이유도 어쩌면 그 것과 연관되있을 지도 모르겠군. "
잠시 먼 곳을 쳐다보던 선장이 말을 이었다.
"...로맨토피아엔 기적이 있다고 하네. 이제까지 항해를 하면서 경험했던 모든 이상적인 것들이 그 안에 있다고 하더군. 사랑이건 성공이건 항해를 하면서 본 1200피트가 넘는다는 청새치도. 어쩌면 거기 있을지도 몰라. 내가 사랑이라 믿고 찾아나선 여인네 중에 진짜가 그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관둡세.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나 해놨군."
"선장님... 저도 선장님의 여객선 명부에 이름을 적을 영광이 있을지요. "
"좋을대로. 단 바다에 빠져 죽어도 책임은 없네. "
선장은 그렇게 말하곤 건달패에게 찔렸다는 한쪽 가슴을 담담하게 부여잡고는 홀로 승선했다.
사실 선원들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아니 내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일 수도 있다. 작은 배이지만,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듯한 낭만과 외경스럽고도 기이한 분위기가 있었다.
발을 질질 끄는 그에게 건달의 칼에 찔린 상처는 이제껏 겪었던 어떤 상처보다도 큰 듯 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아랑곳 하지 않은 듯한 그 발걸음에는, 온몸의 흉터가 얼룩져 흘러나온 피가 그 발자국을 조용히 지워나가고 있었다. 그동안 숫하게 칼에 가슴을 난도질 당하고도, 그저 피만 흘린 채 치료를 하지 않은 그의 심장이었다.
홀린 듯 나는 배에 올라탔다. 회중시계는 새벽을 알리고, 먼 뱃고동소리가 항구를 깨웠다.
항구에서는 별로 신선하지 못한 생선냄새가 흘렀다.
배가 막 출항을 하는 그 순간, 선장의 눈이 선창가 귀퉁이에서 몰래 그를 처다보고 있는 한 여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선장이 목숨을 걸고 구해줬다는 그 여인네임이 분명하다.
선장은 잠시 이를 악물었다가, 고개를 돌리고 오케스트라의 단원을 지휘하듯 손을 휘두르며 내게 외쳤다.
"자네는 꼭 내 이야기를 잊지 말고 적어두도록 하게. 언젠가 세상에 나올 '신천지 로맨토피아로 떠나는 모험'이란 소설이니까. 그것도 살아남아 있다면 말이야.
자, 이만 가도록 하지.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게 되어 있어. 마음조각은 충분히 찢어 저 여자를 주었으니, 남은 것은 그곳을 향한 출항 뿐이네. 묵묵히 먼 바다를 향해 가는 거 ᆢ 그거면 충분해."
뱃고동 소리가 선장의 웃음소리를 휘감아 올려 배보다 먼저 바다로 향했다.
- 끝-
2008/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