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에 내가 쓴 소설 속 선장이 18년 뒤 나에게 가르쳐준 것
[유희적 투쟁] 1화
떠난 배에 침을 뱉어봤자,
바닷물만 오염시킬 뿐이다
— 2008년에 내가 쓴 소설 속 선장이 18년 뒤 나에게 가르쳐준 것
이 연재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소설 한 편을 읽어주기를 부탁드린다.
2008년에 내가 쓴 짧은 글이다. 그때 나는 이것이 무슨 글인지 몰랐다. 18년이 지난 지금, 이 소설이 내가 평생 써온 철학의 원형이었다는 것을 안다. 설명은 소설이 끝난 뒤에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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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항 〉
2008. 05. 07
'노스텔지어의 깃발'이라고 끄적혀진 깃발이 나부낀다. 맑은 달밤에 배는 출항을 앞두고 어둠 속에 잠겨있다. 뱃머리에 무인도의 등대가 걸렸다.
선장은 부둣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그는 남색모자를 썼고, 만상萬想의 그림자가 담긴 듯한 깊은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사람들에게선 경박하고,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인간 취급을 받긴 했지만, 그런 이 항구의 사람들도 은근히 그를 경외시했다.
환상적이고도 오만한 선장의 분위기에 젖어, 선장에게 말 한마디 건네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웠지만 지금 아니면 또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아 용기를 냈다.
"내일 떠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가시기 전에… 이곳에 미련은 없으신지…"
"… 자네는 모를 걸세, 난 머무르는 항구마다 내 마음조각들을 한 조각씩 남기지. 항해의 첫날부터 파고가 높아도, 그 조각 하나에 담긴 마음을 핑계로 출항을 명령한다네. 망할 선원들은 고생 좀 하는 편이고 말이지."
선장에게 물었다. 이 항구의 건달패에게 칼을 맞고도 치료하지 않은 채 출항을 준비한다는 소문에 대해. 목숨을 걸고 구해준 여인이 겁을 먹고 도망갔다는 이야기에 대해.
"…그런 말을 하는 의도가 뭔가. 훗… 한가지 충고 해주지. 떠난 배에 대고 침을 뱉어봤자, 바닷물이나 오염시킬 뿐이야. 그런 식이라면 나의 상처는 수도 없지. 그걸 어떻게 하나하나 기억하고 살아가야만 하겠나."
잠시 먼 곳을 쳐다보던 선장이 말을 이었다.
"…로맨토피아엔 기적이 있다고 하네. 이제까지 항해를 하면서 경험했던 모든 이상적인 것들이 그 안에 있다고 하더군. 사랑이건 성공이건. 어쩌면 거기 있을지도 몰라. 내가 사랑이라 믿고 찾아나선 여인네 중에 진짜가 그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관둡세.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나 해놨군."
"선장님… 저도 선장님의 여객선 명부에 이름을 적을 영광이 있을지요."
"좋을대로. 단 바다에 빠져 죽어도 책임은 없네."
선장은 그렇게 말하곤 건달패에게 찔렸다는 한쪽 가슴을 담담하게 부여잡고는 홀로 승선했다. 발을 질질 끄는 그에게, 건달의 칼에 찔린 상처는 이제껏 겪었던 어떤 상처보다도 큰 듯 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아랑곳 하지 않은 듯한 그 발걸음에는, 온몸의 흉터가 얼룩져 흘러나온 피가 그 발자국을 조용히 지워나가고 있었다.
홀린 듯 나는 배에 올라탔다. 회중시계는 새벽을 알리고, 먼 뱃고동소리가 항구를 깨웠다.
배가 막 출항을 하는 그 순간, 선장의 눈이 선창가 귀퉁이에서 몰래 그를 처다보고 있는 한 여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선장이 목숨을 걸고 구해줬다는 그 여인네임이 분명하다. 선장은 잠시 이를 악물었다가, 고개를 돌리고 손을 휘두르며 내게 외쳤다.
"자네는 꼭 내 이야기를 잊지 말고 적어두도록 하게. 언젠가 세상에 나올 이야기이니까. 그것도 살아남아 있다면 말이야. 자, 이만 가도록 하지.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게 되어 있어. 마음조각은 충분히 찢어 저 여자를 주었으니, 남은 것은 그곳을 향한 출항 뿐이네. 묵묵히 먼 바다를 향해 가는 거… 그거면 충분해."
뱃고동 소리가 선장의 웃음소리를 휘감아 올려 배보다 먼저 바다로 향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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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뒤, 나는 이 선장이 누구인지 알았다
2008년의 나는 이 글을 쓰며 그저 무언가를 버티고 있었다. 사람들이 나를 경박하다고 할 때, 속을 알 수 없다고 할 때, 그럼에도 나는 왜 항해를 멈추지 않는가를 이야기 속에서 확인하고 싶었다.
그 선장은 가슴에 칼을 맞고도 치료하지 않는다. 구해준 여인이 도망가도 그녀를 원망하지 않는다. 상처를 세어가며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떠난 배에 대고 침을 뱉어봤자, 바닷물이나 오염시킬 뿐이야."
지금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다. 과거의 상처에 피해자 서사를 덧씌우는 행위는 세계를 바꾸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자기 자신을 오염시킬 뿐이다.
그 선장이 찾아 나선 로맨토피아는 세계의 끝에 있는 섬이 아니었다. 피를 흘리면서도 출항을 멈추지 않을 수 있는, 자기 자신 안의 굳건한 지점이었다.
18년 뒤, 나는 이 선장에게 이름을 붙였다. 루두스 아르마투스(Ludus Armatus). 유희적 투쟁가. 이 연재가 다루는 철학의 마지막 법칙이자, 내가 2008년에 이미 이야기 속에서 먼저 살고 있던 것이다.
철학이 언어화되기 10년 전에, 나는 그것을 소설로 먼저 살고 있었다.
그런데 더 오래된 이름이 있었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이것을 '영웅의 여정'이라 불렀다. 출발 — 입문 — 귀환. 세 단계.
2008년의 선장은 출발이었다. 소명이 뭔지도 모른 채 출항하는 것. 그것이 영웅의 첫 번째 단계다.
그 이후 진흙탕의 18년은 캠벨이 '고래의 배 속'이라 부른 입문이었다. 자아가 해체되는 시간. 피해자이자 가해자이기도 한 이중성을 온몸으로 배운 시간.
이 연재가 귀환이다. 18년의 시련에서 건져 올린 언어들. 선장이 로맨토피아에서 찾은 것은 결국 이것이었다.
신화가 먼저 알고 있었다. 선장도 알고 있었다. 나는 나중에 그것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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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가 시작하는 이유
이 연재의 이름은 《유희적 투쟁: 이중성의 존재론》이다. 총 15화를 예정하고 있다.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당신은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다. 이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싸울 수 있다.
2026년 한국 사회는 모두가 피해자를 자처하며 서로를 향해 칼을 휘두른다. 젠더 갈등, 세대 갈등, 계층 갈등. 갈등의 이름은 달라지지만 구조는 같다. 피해자가 되는 것이 도덕적 면허증이 되었다.
이 연재는 그 면허증의 작동 구조를 해부한다. 그리고 면허증 없이도, 피해자 서사 없이도, 자신의 힘으로 서는 방법을 제시한다.
위로를 주려는 것이 아니다. 언어를 주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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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 예고
2화 — 순수한 피해자라는 마약
당신이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깊이 상처받은 순간을 떠올려보라. 그 갈등의 타임라인 어딘가에서, 당신이 취한 행동이 완벽하게 결백했는가?
피해자가 되는 것이 왜 현대 사회에서 강력한 자원이 되었는가. 그리고 그 자원이 어떻게 우리를 더 깊은 갈등 속으로 끌어당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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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