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왜 가해자이기를 두려워하는가
[유희적 투쟁] 2화
순수한 피해자라는 마약
— 우리는 왜 가해자이기를 두려워하는가
1화에서 우리는 선장의 이야기를 읽었다. 가슴에 칼을 맞고도 출항을 멈추지 않는 선장. "떠난 배에 침을 뱉어봤자 바닷물만 오염시킬 뿐"이라고 말하는 선장.
오늘은 그 선장과 정반대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에게 침을 뱉는다고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믿음이 얼마나 달콤한지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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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마지막으로 억울했던 순간을 떠올려보라
당신이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깊이 상처받은 순간을 떠올려보라.
그 사람은 분명히 잘못했을 것이다. 당신이 억울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나는 그 감정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보자. 그 갈등의 타임라인 어딘가에서, 당신이 상대방에게 취한 행동이 완벽하게 결백했는가? 한 마디도, 한 번의 침묵도, 한 번의 무관심도 — 그 어떤 것도 상대방을 찌르는 칼이 되지 않았는가?
대부분의 경우, 정직하게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불편한 사실을 보지 않으려 한다. 그 이유가 이 글의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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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위치의 구조적 이점 — 면허증 발급
피해자가 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강력한 사회적 자원이다.
피해자는 즉각적인 공감과 연대를 얻는다. 피해자는 도덕적 의심을 받지 않는다. 피해자는 반격의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피해자는 자신이 행사한 폭력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 네 가지를 동시에 제공하는 포지션이 피해자 말고 또 있는가?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은 주변의 지지를 얻는다. 연인에게 상처받은 사람은 친구들의 위로를 받는다. SNS에서 집단적 모욕을 당한 사람은 구독자들의 분노 대리를 받는다. 피해자의 자리에 앉는 순간, 사회는 당신 편이 된다.
이것이 피해자 서사가 마약처럼 작동하는 이유다. 도덕적 면허증, 즉각적인 사회적 지지, 공격의 정당성.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제공하는 포지션은 피해자 말고 없다.
그리고 이 마약은, 의식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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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가 말한 것: "여기요!" 하고 대답하는 순간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을 "호명(Interpellatio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경찰이 길에서 "이봐, 거기 당신!"이라고 부른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이 뒤를 돌아본다. 그 순간, 그 사람은 자신이 그 호명의 대상임을 인정한 것이다. 스스로 "피의자"라는 정체성을 수락한 것이다.
알튀세르의 핵심은 이것이다. 우리는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응답함으로써, 그 호명이 규정하는 주체가 된다.
2026년 한국 사회의 가장 강력한 호명은 이것이다.
"피해자가 누군가? 바로 너야."
미디어가 호명한다. 커뮤니티가 호명한다. 법이 호명한다. 친구가 호명한다. 알고리즘이 당신이 가장 분노할 피해자 서사를 골라 호명한다.
그 호명에 "여기요!"라고 대답하는 순간, 당신은 피해자가 된다. 그리고 피해자가 되는 순간, 가해자이기도 한 당신의 다른 면은 자동으로 시야 밖으로 밀려난다.
이것이 의지의 문제가 아닌 이유다. 이것은 구조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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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성 불감증이 작동하는 방식
나는 이것을 이중성 불감증(Duality Blindness)이라고 부른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그의 억울함은 실재한다. 그런데 동시에 그는 자신의 부하직원에게 동일하거나 더 교묘한 방식으로 압박을 가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전체 인지 구조가 이미 피해자 서사에 점령당해 있다면, 그 사실은 그의 의식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필터링된다.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위선이 아니다. 의식적 기만도 아니다. 구조적 맹목이다.
SNS 젠더 논쟁을 보면 이것이 선명해진다. 남성 피해자를 외치는 사람은 여성 피해 사례를 구조적으로 못 본다. 여성 피해자를 외치는 사람은 남성 피해 사례를 구조적으로 못 본다. 양쪽 모두 진심이다. 양쪽 모두 실재하는 고통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양쪽 모두 자신이 보지 못하는 반쪽을 갖고 있다.
피해자 호명이 가해성 인지 회로 자체를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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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100년 전에 이미 말했던 것
니체는 19세기 말에 이미 이 구조를 간파했다.
그는 이것을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고 불렀다. 무력한 자가 강한 자에게 직접 복수할 수 없을 때, 그 원한이 내면에서 발효되어 도덕적 가치를 전도시키는 심리적 메커니즘이다.
"강한 것은 악이고, 약한 것은 선이다." "지배하는 것은 죄악이고, 희생당하는 것은 미덕이다." — 르상티망은 이렇게 피해자를 도덕의 정점에 올려놓는다.
니체는 이것을 약자의 전유물로 분석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2026년에는 강자도 피해자 서사를 사용한다. 재벌이 규제 피해자임을 주장하고, 다수집단이 역차별 피해자임을 외친다. 권력을 가진 자들도 피해자 정체성의 마약을 욕망한다. 르상티망은 이제 계층에 무관하게 보편적으로 작동하는 존재론적 현상이다.
피해자 서사는 더 이상 약자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가해성을 직면하지 않기 위해 사용하는 구조적 방어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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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 글은 피해자 경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받은 상처는 실재한다. 당신의 억울함은 사실이다. 구조적 차별은 분명히 존재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이것이다: 그 피해의 사실성이, 당신이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지우지 않는다. 두 사실은 동시에 참이다.
그리고 바로 이 동시성을 직면하는 것이 — 불편하고, 고통스럽고, 자존심 상하는 그 직면이 — 피해자 서사의 마약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출구다.
이것은 자기혐오를 권고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자신의 가해성을 인정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자만이, 피해자 서사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설 수 있다.
피해자 서사를 버리는 것은 억울함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억울함을 연료로 삼되, 피해자라는 포지션에 영구히 묶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한 가지 더 — 캠벨이 이것도 알고 있었다
조셉 캠벨의 영웅 여정에서 두 번째 단계는 '입문'이다. 영웅이 '고래의 배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 이 단계의 핵심은 하나다: 이전의 자아가 죽어야만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피해자 서사의 마약도 정확히 여기서 작동한다. '순수한 피해자'라는 자아 — 완벽히 결백한 나 — 를 놓지 않는 한, 우리는 고래의 배 속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한다. 입문의 시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피해자 서사를 끌어안고 안주하는 것이다.
억울했던 그 순간을 다시 직면하는 것 — 그것이 영웅의 입문이다. 자아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다. 귀환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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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를 읽기 전에, 한 가지 실험
오늘 당신이 억울하거나 상처받은 기억이 떠오른다면 — 최근 것이든 오래된 것이든 — 딱 5분만 이렇게 해보라.
그 상황의 타임라인을 끝까지 재생해보라. 그 갈등이 처음 시작되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라.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을 들이밀어라.
"내가 그 상황에서 취한 모든 행동이, 단 하나도 빠짐없이 완벽하게 결백했는가?"
답이 "그렇다"라면, 이 연재는 당신에게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답이 "잘 모르겠다" 혹은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라면 — 당신은 지금 이중성 불감증의 회로가 열리는 순간에 서 있는 것이다.
그 순간을 기억해두어라. 3화가 그 순간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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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 예고
3화 — 세계는 이렇게 짜여 있다 — 3대 공리
피해자 서사의 마약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세계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도덕적 결함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가 짜인 방식이다.
3대 공리가 그것을 증명한다: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당신은 이미 누군가의 공간을 재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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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