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흙탕에서 철학을 직접 발명해야 했던 이유
[유희적 투쟁] 4화
구원자는 오지 않는다
--- 진흙탕에서 철학을 직접 발명해야 했던 이유
3화에서 우리는 세계의 구조를 알았다.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누군가의 공간이 재편된다. 두 사람의 억울함은 같은 단위로 측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다.
이것을 알았다면, 이제 당연히 이런 질문이 온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누가 나를 구해주는가.
나도 같은 질문을 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10년 넘게.
그리고 동아줄을 찾아 헤매던 끝에 가장 서늘한 진실 하나와 마주쳤다.
구원자는 오지 않는다.
이것은 절망의 선고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이것이 왜 자유의 출발점인지, 순서대로 이야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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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동아줄 : 기독교의 제단
내 삶이 처음으로 제대로 무너졌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제단 앞에 섰다. 공들여 쌓아 올린 것들이 무너지고, 믿었던 관계가 흩어지고, 의도치 않게 가해자로 호명되는 경험들이 겹치던 시절이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을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보다 큰 무언가를 찾는다.
기독교의 제단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원죄를 가진 불완전한 죄인이다. 스스로는 구원받을 수 없으니 오직 신의 은총에 기대라."
절반은 맞았다. 나는 무결한 피해자가 아니었으니까. 내 손에 흙이 묻어 있다는 것,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다는 것 — 그 진단은 정확했다.
그런데 처방이 문제였다. 무릎을 꿇고 기다리라는 것. 외부의 구원자가 내려올 때까지 수동적으로 있으라는 것.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진흙탕을 벗어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진흙탕 속에서 무언가를 짓고 싶었다.
첫 번째 동아줄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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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동아줄 : 불교의 법당
다음으로 법당을 두드렸다. 연기(緣起)와 무아(無我)의 가르침은 아름다웠다. 집착을 버리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 모든 것은 조건에 의해 생겨나고 조건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진다는 것.
이 가르침은 실제로 위안이 됐다. 억울함을 붙들고 있는 것이 나를 더 소진시킨다는 것을 이해했다. 고통의 원인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집착에 있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근본적인 물음에 부딪혔다.
세계로부터 도피하는 것과, 세계 안에서 싸우는 것은 다르다.
불교는 내게 어떻게 고통에서 멀어질지를 가르쳐줬다. 그러나 나는 고통에서 멀어지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고통을 재료로 삼아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다. 진흙탕을 벗어난 깨끗한 곳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진흙탕 속에서 왕국을 짓고 싶었다.
두 번째 동아줄도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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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동아줄 : 실존주의자들의 서재
마지막으로 실존주의자들의 서재를 파헤쳤다. 여기서는 조금 더 멀리 나아갔다.
니체는 낡은 도덕을 박살 냈다. "신은 죽었다"는 선언은 외부의 구원자에 기대지 말라는 가장 직접적인 언명이었다. 그가 르상티망(Ressentiment)의 구조를 해부하는 방식 — 약자가 강자를 향한 원한을 도덕적 가치로 뒤집는 심리적 메커니즘 — 은 2화에서 이야기한 피해자 서사의 마약과 정확히 연결되어 있었다.
사르트르는 "너는 자유를 선고받았다"며 차가운 칼자루를 손에 쥐여주었다. 인간은 던져진 존재이지만 그 던져짐 속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것. 구원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
이 칼은 날카로웠다. 그러나 누구도 그 칼로 무엇을 어떻게 지을지 설계도를 주지 않았다.
자유의 선고는 받았다. 그런데 그 자유로 무엇을 할 것인가?
니체는 초인(Übermensch)을 말했지만 어떻게 초인이 되는지의 실천론은 빈약했다. 사르트르는 선택을 말했지만 매일의 진흙탕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선택할 것인지의 방법론은 주지 않았다.
세 번째 동아줄도 결국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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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줄이 끊어진 자리에서
완벽한 구원자를 찾아 헤매던 순례의 끝에서, 나는 가장 서늘하고도 명징한 진실과 마주했다.
기독교의 맹목. 불교의 도피. 서양 실존주의의 공허. 그 어떤 거대 서사도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진흙탕을 완벽하게 설명해 주지 못했다. 저마다 빛나는 조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무도 내 삶의 현장에 딱 맞는 전투복을 주지 못했다.
그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절망이 오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텅 빈 해방감이 왔다.
"나를 구원할 완성된 철학은 없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만들어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그 텅 빈 절망의 바닥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기독교에서는 "흠결의 인정"을 가져왔다. 불교에서는 "의미의 유동성"을 가져왔다. 실존주의에서는 "자유의 선고"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 세 가지가 각각 멈춰 선 그 막다른 골목에서 한 발 더 전진하는 것이 내 작업이 됐다.
과거의 사상들이 멈춰 선 곳에서 바통을 이어받아, 남의 옷이 아닌 내 몸에 정확히 맞는 전투복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이중성의 존재론이고, 그 위에 세워진 실천 체계가 유희적 투쟁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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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당신에게 의미하는 것
나는 지금 당신에게 거창한 철학 체계를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 가지를 말하고 싶다.
당신이 지금 어떤 진흙탕 속에 있든, 그 진흙탕에서 당신을 꺼내줄 완벽한 구원자는 오지 않는다. 그 사람이 사과해주기를 기다리는 것도. 시스템이 당신의 억울함을 인정해주기를 기다리는 것도. 세상이 당신의 선함을 알아봐 주기를 기다리는 것도.
구원자를 기다리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당신은 그 자리에 멈춰 선다. 그리고 그 멈춤이 길어질수록 진흙탕은 더 깊어진다.
구원자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처음으로 자신이 어디 서 있는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 진흙탕의 성분이 무엇인지,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하는지, 그리고 이 진흙으로 무엇을 지을 수 있는지.
구원자는 오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진흙탕 속에서 당신만의 유희적 투쟁을 시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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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 예고
5화 --- 무결함이라는 강박을 버려라
구원자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깨끗하게 싸울 수 있는가.
우리는 모두 "나쁜 사람이 되지 않으면서 이길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으면서 전진할 수 있다는 믿음. 그러나 3화에서 이미 알았다.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누군가를 재편하는 행위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죄인인가. 아니다. 정반대다.
� 이 연재의 내용을 더 깊이 탐구하고 싶다면 → 에세이집 《유희적 투쟁: 이중성의 존재론》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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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