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흠결은 파괴가 아닌 건축의 흔적이다
[유희적 투쟁] 5화
무결함이라는 강박을 버려라
--- 흠결은 파괴가 아닌 건축의 흔적이다
4화 말미에 나는 이 질문을 남겼다.
그렇다면 나는 깨끗하게 싸울 수 있는가.
솔직하게 말하겠다. 아니다.
당신은 깨끗하게 싸울 수 없다. 누구도 그럴 수 없다. 그리고 깨끗하게 싸우려는 강박이야말로 당신을 가장 빠르게 소진시키는 독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5화의 전부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하고 나면, 이상하게도 전보다 훨씬 단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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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
당신은 아마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 충분히 배려하고 공감하면 마찰 없이 살 수 있지 않을까. 완벽하게 무해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 욕망은 선해 보인다. 그런데 이것이 왜 존재론적 기만인지를 3화에서 이미 증명했다. 당신이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의 공간을 밀어내는 행위다. 당신의 취업은 누군가의 도태를 전제한다. 당신의 안락함은 누군가의 수고를 치환한 결과다. 당신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 굳게 닫아건 방어벽조차 다가오려던 타인에게는 차가운 폭력이 된다.
무결함은 이 세계에서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이것은 비관론이 아니다. 세계가 짜인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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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결함의 강박이 만드는 역설적 잔인함
"나는 무결하다"는 확신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가장 잔인해진다.
왜인가. 자신이 선량하다는 확신은 내 삶에 닥치는 모든 마찰을 자동으로 "타인의 악의"나 "세상의 불의"로만 치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내가 깨끗하다면 문제는 언제나 외부에 있다. 그리고 외부에 문제가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원망과 분노뿐이다.
이것이 이중성 불감증이 가장 극단적으로 작동하는 순간이다. 자신의 무결함을 지키기 위해 가해성 인지 회로를 완전히 닫아버린 상태. 억울함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낮아진다. 가장 선하다고 믿는 사람이 가장 둔감한 가해자가 되는 아이러니.
진정한 주체성은 내가 얼마나 깨끗한가가 아니라, 내 손에 묻은 흙과 피를 얼마나 정직하게 응시하느냐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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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츠기 — 균열을 금으로 메우는 기술
일본에 킨츠기(Kintsugi)라는 도예 기법이 있다.
깨진 도자기를 버리지 않는다. 대신 그 균열에 금을 흘려 넣어 수리한다. 수리된 도자기는 이전보다 화려하고 단단해진다. 균열은 숨겨야 할 결함이 아니라, 그 물건이 살아온 역사의 훈장이 된다.
이 기법에는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철학이 들어 있다. 깨진 것을 완벽하게 복원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 깨진 흔적을 지우려 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그 균열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되, 그것을 가장 귀한 재료로 메운다는 것.
당신의 흠결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기억. 의도치 않게 가해자가 됐던 순간. 완벽하지 못했던 선택들. 이것들은 지워야 할 수치가 아니다. 그것이 당신이 이 세계와 부딪혀온 흔적이고, 당신을 지금의 당신으로 만든 건축 자재다.
흠결을 지우지 마라. 그 흠결을 금으로 메워 당신만의 서사를 완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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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직접 경험한 것
나는 한때 의도치 않게 가해자로 호명된 적이 있다.
처음에는 억울함이 먼저였다. 내 의도가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었다.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무결함을 회복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싸움을 하면 할수록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에너지가 소진됐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억울함이 커질수록 내가 그 상황에서 취한 행동들이 더 합리화됐다. 상대방이 더 나빠 보였다. 나는 더 순수한 피해자가 됐다.
그것이 이중성 불감증이 작동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무결함을 지키려는 싸움이 오히려 가해성 인지 회로를 닫아버린 것이다.
전환점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때였다.
"억울하든 아니든, 의도가 있었든 없었든, 내가 타인의 경계를 침범하여 파열음을 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순간, 이상하게도 짓눌리던 무게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순수한 피해자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더 이상 순수한 피해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됐다. 상대방이 나를 악인으로 규정하든 선인으로 규정하든, 그 규정 위에 내 존재가 서 있지 않아도 됐다. 나는 내 손에 묻은 흙을 인정한 채로 전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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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무결함의 강박을 내려놓으면 세 가지가 달라진다.
첫째, 에너지가 돌아온다. 무결함을 증명하는 데 쓰던 에너지가 전진하는 데 쓰인다. 더 이상 상대의 인정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둘째, 타인이 보이기 시작한다. 자신의 흠결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타인의 흠결도 다르게 본다. 악의가 아니라 구조로 읽힌다. 저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의 서사가 나의 서사와 충돌한 것이라는 것을. 이것이 공리 2의 실천이다.
셋째, 자신의 흠결이 재료가 된다. 깨진 도자기를 킨츠기로 수리할 수 있으려면 먼저 깨진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균열을 숨기는 사람은 금을 흘려 넣을 수 없다. 자신의 흠결을 정직하게 마주한 사람만이 그것을 서사의 건축 자재로 쓸 수 있다.
당신은 결백한 성자가 아니라, 피투성이의 두 손으로 자신의 왕국을 짓는 건축가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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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 예고
6화 --- 저항이라는 이름의 연료
무결함의 강박을 내려놨다. 흠결을 인정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세상은 당신의 계획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성실하게 쌓아 올린 것이 무너지고, 부당한 압력이 온다. 보통의 사람들은 이 마찰 앞에서 멈추거나 벽을 저주하며 에너지를 소진한다.
그런데 타이어가 도로를 움켜쥐고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마찰 덕분이다. 마찰이 없는 빙판 위에서는 아무리 엔진을 돌려도 바퀴는 헛돌 뿐이다.
� 이 연재의 내용을 더 깊이 탐구하고 싶다면 → 에세이집 《유희적 투쟁: 이중성의 존재론》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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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