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것이다

욥기를 읽으며

by 강석효

나이를 먹을수록
삶에는 설명이 안 되는 일들이 더 많아진다.
젊을 때는 웬만한 일은 이유를 붙여 넘겼다.
노력하면 되고, 참으면 되고, 시간이 지나면 나아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이유를 붙이는 것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지는 날들이 찾아온다.


성경 속 욥이 그렇다.
그가 만난 고난은 잘못해서가 아니었고,
부주의해서도 아니었으며,
신앙이 부족해서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었다.

그런데도 성경은 뜻밖의 장면을 기록한다.
모든 것을 잃은 욥이 땅에 엎드려 예배했다는 기록이다.
그 예배는 차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요하기는커녕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무너진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무너진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해 엎드렸다.


욥의 예배가 특별한 이유는
그가 상황을 긍정해서도 아니고
현실을 미화해서도 아니다.
이미 세상적인 축복과 풍요는 다 사라진 뒤였다.
그럼에도 욥은 예배했다.
그의 예배는 조건이 없었다.


욥이 입술을 열어 말한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이 말은 체념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본질을 건져 올린 고백에 가깝다.
우리는 살아오며 수없이 “내 것”이라는 말을 해왔다.
내 집, 내 자식, 내 건강, 내 계획, 내 노후….
그러나 인생의 어느 지점에 이르면
그 모든 말들이 허공에 뜬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욥은 그 지점에서 한 가지를 붙든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인식.
이 한 문장이 그의 삶을 무너지지 않게 붙잡아 준 기둥이었다.
그래서 그는 원망하지 않았다.
울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아프지 않았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을 향해 어리석게 말하지 않았다.


이 고백은 냉정한 신앙이 아니다.
오히려 아주 오래 하나님과 함께 살아온 사람의
속 깊은 체념이자 신뢰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인식은
붙잡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준다.
잃을까 두려워 움켜쥐지 않아도 되는 안도를 준다.


그리고 이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더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가 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내 아들이 너를 위해 내 것이다”라고 내어주셨다.
십자가는 소유의 논리가 아니라
내어줌의 논리로 세워진 자리다.


그래서 우리는 말할 수 있다.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고.
내가 붙잡고 있는 것보다
나를 붙잡고 계신 분이 더 크시다고.


욥의 고백은
고난을 피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자리를 남겨준다.


오늘도 우리는
삶의 크고 작은 상실 앞에 서 있다.
그러나 한 가지만 분명하면 된다.


이 삶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내일도
나는 그분 앞에 엎드릴 수 있다.


그 자리가
절망의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자리임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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