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다니는 사람과 예수를 믿는 사람의 갈림길에서
누군가 주말에 어디 가느냐고 물으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교회에 갑니다” 하고 말할 수 있다.
그 한마디 안에는
내가 속해 있다는 자리와
오래 머물러 온 시간들이 함께 담겨 있다.
그래서인지 그 말은
마치 안전한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듯한
묘한 안도감을 준다.
그러나 인생이 늘 그렇듯,
가장 조용한 순간에
가장 아픈 질문 하나가
마음 한편을 건드린다.
나는 정말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일까.
아니면 그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일까.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장소에 익숙해지는 일이다.
예배 순서는 몸이 먼저 알고,
기도의 말투는 어느새 입에 배어 있다.
찬송가의 멜로디는
첫 소절만 들어도
자연스럽게 다음을 따라가게 된다.
이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은혜다.
감리교 신앙이 말하듯,
하나님은 우리가 믿기 전에
이미 우리를 교회로 불러오신다.
그 부르심 속에서
우리는 모르게 보호받고,
모르게 길러진다.
그것을 선행은총이라 부른다.
문제는 늘 그다음이다.
교회에는 익숙해졌는데
예수님은 여전히 낯설 때,
신앙은 서서히
삶을 건드리지 않는 습관이 된다.
손에 익은 일상처럼
생각 없이 반복되는 종교가 된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나 삶의 갈림길 앞에서는
예수님을 부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손해가 예상되면
믿음보다 계산이 먼저 나오고,
상처를 받으면
용서보다 마음의 벽이 먼저 세워진다.
주일에 했던 고백과
평일에 살아내는 삶이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듯 느껴진다.
믿음의 사람은 조금 다르다.
그들도 완벽하지 않다.
실수도 하고, 넘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가 있다.
넘어졌을 때
다시 돌아올 줄 안다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은 안다.
예수님 앞에 서면
삶이 가끔 불편해진다는 사실을.
말씀이 마음을 찌르고,
양심이 잠을 깨우고,
관계의 방식이 흔들릴 때가 있다.
그 불편함은
결코 달갑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밀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붙든다.
주님이 흔드시는 이유는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다시 세우기 위함이라는 것을
삶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감리교 신앙은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는 믿음을 말하지 않는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믿음을 말한다.
칭의로 시작하여
성화로 천천히 걸어가는 길,
말이 아니라 삶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여정이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조금씩 변한다.
눈에 띄게 달라지지 않아도,
방향은 분명히 달라진다.
말이 조금 부드러워지고,
판단보다 이해가 앞서고,
나보다 타인을
한 번 더 생각하는 순간이 늘어난다.
그 작고 느린 변화들이
성화의 흔적이다.
어쩌면 우리 대부분은
아직 ‘믿음의 사람’이라 말하기보다
‘믿음의 사람이 되어 가는 사람’ 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교회를 다니는 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자리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면.
교회를 다닌다는 말에서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고백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출석이 아니라 관계로,
습관이 아니라 순종으로,
말이 아니라 삶으로.
그 길이 느리고 더디게 느껴질지라도,
은혜는 언제나
그 길 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