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 곁에서 함께 앉는다는 것
지난 목요일 오후에, 한 성도 가정으로부터 아픈 소식을 들었다.
병원에서, 의사의 입을 통해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위로의 문장은 머릿속에서 맴돌았지만 입 밖으로 나오기에는 그 말들이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
아픔 앞에서 말은 늘 먼저 부끄러워진다.
병원이라는 공간은 참 이상하다.
희망과 절망이 하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아주 가까이 서 있다.
어제까지 일상이었던 몸이 오늘은 검사 수치로 불리고, 사람은 환자가 되고, 가족은 보호자가 된다.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시간은 의사가 말하는 몇 분이 아니라 마음이 무너지는 몇 날, 몇 밤이다.
그 가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교회에서 늘 웃던 모습, 예배 자리에서 고개 숙이던 모습, 별일 없는 듯 서로 안부를 묻던 평범한 장면들.
우리는 늘 그렇게 평범한 하루가 당연한 것처럼 살다가 그 평범함이 얼마나 큰 은혜였는지를 뒤늦게 깨닫는다.
아픈 소식은 늘 조용히 온다.
예고도 없이, 양해도 없이, 그저 문을 열고 들어와 삶의 중심을 바꿔 놓는다.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는 믿음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똑같이 작아진다.
나는 그날 저녁,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기도를 하면서도 기도 같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무언가를 달라고 말하기보다는 그저 이름을 불러보는 기도였다.
“하나님, 이 이름을 아십니까.”
그것이면 충분하다는 듯 잠시 침묵 속에 머물렀다.
살다 보면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처럼 이유를 찾고, 의미를 묻고, 답을 요구한다.
하지만 고통은 설명으로 견뎌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견뎌질 때 비로소 조금 가벼워진다.
그 가정에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곁이다.
잘 쓴 말 한 문장보다 조용히 함께 앉아 있는 시간,
“오늘은 내가 같이 아파하겠다”는 말 없는 약속일 것이다.
우리의 신앙도 결국 그 자리에서 드러난다.
기도가 응답될 때가 아니라 아직 아무 일도 변하지 않았을 때,
그래도 함께 울어줄 수 있는가, 그래도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가?
지난 목요일 오후의 그 소식은 누군가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언젠가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매우 조심스럽게 이 글을 남긴다.
아픔을 정리하려고 가 아니라 아픔 곁에 잠시 앉아 있기 위해서.
말은 적어도 괜찮다.
눈물이 먼저여도 괜찮다.
지금은 그저
곁에 있어주는 서로의 체온을 잃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믿음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