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완벽한 감정정리가 아닌 심판의 자리를 하나님께 돌리려 드리는 것.
살다 보면, 사람 마음이 꼭 오래된 장롱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겉은 반질반질 윤이 나는데, 서랍 하나쯤은 유난히 뻑뻑합니다. 괜히 힘주어 열었다가 먼지라도 확 날릴까 봐, 그냥 모른 체 닫아 두는 칸 말입니다. 그 안에는 대개 사람 하나가 들어 있습니다. 이름만 떠올라도 가슴이 묘하게 저릿해지는 그 사람.
세월이 약이라더니, 어떤 상처는 세월을 먹고 더 또렷해집니다. 젊은 날에는 분노가 앞섰다면, 나이가 들수록 억울함이 오래 남습니다. “그때 왜 나는 그런 말을 들어야 했을까.” “왜 나는 설명조차 들을 수 없었을까.” 이미 끝난 일인데도, 마음속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장면처럼 재생됩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지만, 속에서는 그날의 말투와 표정이 계절마다 다시 피어오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한 문장을 꼭 넣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그리고 기도를 마치신 뒤, 다른 간구들은 설명하지 않으시고 오직 이것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이 말씀은 들을 때마다 마음을 움찔하게 합니다. 마치 무거운 문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선명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은 우리를 겁주려는 경고라기보다 우리 영혼을 지키기 위한 사랑의 안내입니다. 용서하지 못한 마음은 결국 나를 먼저 가두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향해 쥐고 있던 주먹이 실은 내 숨통을 조이고 있었음을 우리는 뒤늦게 깨닫습니다.
우리는 흔히 용서를 상대를 위한 일이라고 여깁니다. “그 사람 좋으라고 내가 왜 용서해?” 하고 속으로 되묻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상대를 놓아주는 동시에 나를 풀어주는 일입니다. 미움은 밧줄과 같습니다. 상대를 묶는 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 다른 쪽 끝을 내가 꼭 쥐고 있습니다. 놓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수록 손바닥에는 더 깊은 자국이 남습니다. 밤이 깊어질수록 그 자국은 더 선명해지고, 괜히 엉뚱한 사람에게 날 선 말이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은 아직 사과하지 않았고,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먼저 용서를 선택하셨습니다. 용서는 감정이 다 풀린 뒤에 가능한 일이 아니라, 사랑이 먼저 결단하는 일임을 십자가는 보여줍니다.
우리는 아직 그만큼 크지 않습니다.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고, 상처는 생각보다 오래갑니다. 그래도 이렇게는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제 마음은 아직 아프지만, 이 사람을 주님께 맡깁니다.” 용서는 완벽한 감정 정리가 아니라, 심판의 자리를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작은 순종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당장 다 잊어버리겠다는 결심이 아니라, 그 이름을 들고 십자가 앞에 한 번 더 서는 일입니다.
인생의 후반전이 원망의 되풀이가 아니라 찬송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래 붙들고 있던 이름 하나를 조심스레 내려놓을 수 있다면, 우리 안의 공기가 조금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막혀 있던 기도가 다시 흐르고, 굳어 있던 표정이 조금은 풀릴지도 모릅니다.
용서라는 이름의 열쇠를 오늘 다시 손에 쥐어 봅니다.
그 열쇠는 상대의 문이 아니라, 어쩌면 내 영혼의 문을 여는 열쇠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