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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일 국회에서 만난

비상계엄으로 45년 만에 만난 그 사람, 그 아픔, 그 다짐

by 수형

12월 3일 국회에서 만난



나오는 사람들

진수_현 국회의원

정오_진수의 대학 친구



어둠 속에서 매우 소란한 소리가 들린다. 12월 3일 비상계엄 선언 후 국회 앞에서 경찰과 시민들이 대치하는 소음. 간간히 진수의 목소리가 들린다.


진수(목소리) (흥분해서) 경찰이 국회를 왜 막아? 이건 불법이야. 불법!

비켜. 나 들어가야 돼. 비켜. 비키라고! 경찰이 법을 지켜야지. 국회를 왜 막아? 비켜!


밝아지면 국회 정문에서 좀 떨어진 한적한 곳이다. 매우 지친 진수가 두통을 호소한다.


진수 아, 머리야. 미친... 도대체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비상계엄이야?

골통 같은 새끼, 미친놈, 돌아이! (지쳐서) 아, 머리야.

정오 (나타나서) 저... 김진수 국회의원이시죠?

진수 (놀라서) 네? 누구...

정오 (웃으며) 나야 정오.

진수 (의아해하며) 정오?

정오 오랜만이다. 국회의원된 건 알았는데, 여기서 만나네.

진수 너...

정오 (웃으며) 그래. 전남대 80학번.

진수 네가 어떻게..

정오 (한쪽을 가리키며) 저기 군인들 온다. 뛰어!

진수 (뛰며) 어...


두 사람, 뛰어서 무대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주변을 살피며 계속 이동한다.


정오 (주변을 살피며) 45년 만이야. 반세기가 지났어.

진수 와, 45년!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스무 살인데...

정오 진도 촌놈이 광주에 왔는데, 진수 네가 잘해줬잖아.

진수 뭘 잘해줘. 그냥 같이 놀았지. 데모하면서..

정오 너랑 놀 때 진짜 재밌었는데... 미팅도 하고...

진수 나도 미쳤지. 어떻게 첫 미팅에서 만났던 여자랑 지금까지 같이 사냐?

정오 경자 씨 잘 있지?

진수 잘 있어. 애 둘 대학 보내고, 잘 살아.

정오 알지? 경자 씨 내가 먼저 찍었는데... 너니까 양보한 거다.

진수 그래, 무지 고맙다. 그 여자가 나 자는 거 깨워서. 비상계엄 터졌다고, 빨리 국회 가라고,

국회에서 해제 못하면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이 밤에 날 내쫓더라.

정오 여전히 씩씩하네.

진수 그때는 세상이 험악해서 저렇게 작고 여린 여자가 씩씩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살아보니까, 험악한 세상보다 그 여자가 더 쎄. (웃는다.)

정오 (주변을 살피다가) 진수야, 여기서 담 넘자.

진수 그래. 더 돌아다녀 봐야 국회 담이 거기서 거기다.

정오 내가 엎드릴 테니까, 밟고 올라가.

진수 네 신세 좀 지자.


진수, 정오의 등을 밟고 담을 넘는다. 정오도 어렵게 담을 넘어간다.


진수 괜찮아?

정오 괜찮아. 저기 국회 현관 앞에 군인들이 깔렸네. 옛날처럼...

진수 (심각하게) 뭐야. 총도 들고 있잖아. 미친 거 아냐.

정오 진수야. 꼭 들어가라. 이번엔 비상계엄 꼭 해제하자.

진수 그래야지.


순간, 헬기 소리가 들린다. 엄청난 헬기 소음이 공간을 압도한다.


진수 (겁을 먹으며) 뭐야? 헬기야?

정오 (염려하며) 진수야!

진수 (점점 흥분하며) 미친 새끼!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또 헬기야!

정오 진수야, 진정해.

진수 왜 국회에 헬기를 띄워? 또 총이라도...


순간, 허공에서 기관단총 소리가 들린다. 거칠도 단호하다.


진수 (매우 놀라며) 아악!

정오 진수야, 진정해!

진수 (발작을 하며 무서워서) 숨어! 숨어!

정오 (차분한 목소리로 안쓰럽게) 진수야!

진수 (더 흥분해서 허공을 향해) 그만해! 쏘지 마! (어딘가를 보고) 정오야, 숨어!


계속 울리는 거친 기관단총 소리.


진수 (공포에 싸여) 쏘지 마! 그만해!

(45년 전, 총에 맞아 죽은 정오가 떠오른다.) 정오야! 정오야! 정오야!


진수 귀에만 들렸던 기관단 총소리가 서서히 사라진다.


진수 (그제야 과거의 정오를 인식하고) 숨어... 잘 숨었어야지...

정오 (차분히) 광장이라, 숨을 곳도 없었어.

진수 (울면서) 그래도 잘 도망갔었야지. 나처럼... 미안해. 같이 못 가서...

정오 네가 왜 미안해.

진수 다시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어. 무서워. 일어날 수가 없어.

정오 저기가 국회 정문이야.

진수 응.

정오 저기밖에 없어. 비상계엄을 막을 수 있는 곳은.

진수 응.

정오 저기 군인들 사이로 보좌관들이 보이지?

진수 응.

정오 그곳으로 뛰어. 국회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끝까지 뛰어.

진수 응.

정오 이번에는 꼭 막아줘.

진수 응. (사이) 비상계엄 막고, 너 보러 망월동으로 갈게.

정오 응.

진수 (호흡을 가다듬고) 아, 이제 정신이 번쩍 난다. 정오야, 나 간다!

정오 응.

진수 (국회를 바라보고 힘껏 소리를 지르며 뛸 준비를 한다.) 야, 이 미친 새끼야!


국회에 착륙하는 헬기 소리가 다시 크게 들린다.


암전.




*

과거가 현재를 지켜주네요. 정말...

그날 국회로 달려간 모든 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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