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년의 생명이 걸린 배심원 12명의 치열한 설전
연극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1957년 미국 영화 <12 Angry Men>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배심원 제도를 배경으로 한 이 법정 드라마는, 영화 자체가 '연극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았던 만큼, 무대 위에서의 전환 또한 비교적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연극의 기본 구성은 간결하다. 한 소년이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고, 12명의 배심원은 유죄 혹은 무죄를 만장일치로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첫 투표에서 11명이 유죄를, 단 한 명이 무죄를 주장하며 토론이 시작된다. 이견을 제시한 한 사람의 끈질긴 의문 제기는 점차 동조를 얻어가고, 11:1의 구도가 10:2, 9:3, 8:4, 6:6을 거쳐 다시 10:2로 바뀌는 흐름 속에서, 관객은 몰입해서 이야기를 따라간다.
비록 오래된 원작에 기반한 서사지만, 이 작품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강한 몰입감을 주는 이유는 우리 현실과의 교차 때문이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인용 결정, 대법원의 유력 정치인 판결 등은 법과 정의, 진실의 판단이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 이뤄지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연극 속 배심원들은 비전문가이며, 재판 경험도 없는 일반 시민이다. 하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협의와 토론의 과정은 오히려 숭고하다. 불완전함을 인정하되, 그 안에서 최선의 결론을 도출하려는 태도는 ‘법’과 '사회'와 '인간'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극 중 배심원들의 태도는 때로는 속물적이고 충동적이다. ‘만장일치’가 되어야만 방을 나설 수 있다는 압박, 불량한 가정환경에 대한 선입견, 타인의 주장에 대한 분노는 합리적 이성을 훼손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격렬한 갈등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공방이 된다. 피고가 단지 16세 소년에 불과하며, 그 결정에 그의 삶 전체가 달려 있음을 자각하면서, 이들은 점점 더 사회적 책임과 양심의 무게를 체감한다. 그 누구도 ‘사실’을 알 수 없지만, 진실을 향한 이들의 집요한 탐구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정의 구현의 한 형식이다. 그에 비해, 법을 아는 우리나라 대법관들은 얼마나 진지한 탐구와 질문, 협의를 성실히 거쳤는지, 의문이 든다.
연극은 배심원들의 인식이 변화해 가는 과정을 치밀하게 묘사한다. 피고인의 유죄를 당연시하던 인물들이 사건의 세부를 다시 바라보며, 선입견 속에 놓쳐왔던 ‘합리적 의심’을 발견해 나간다. 이 과정은 곧 자신들의 판단이 사회적 파급력을 가진 결정임을 인식하게 하는 자각의 여정이기도 하다. 극 중에 한 배심원이 말한 사회적 책임이란 단어가 오래 남는다.
무대는 간결하다. 사각의 링을 연상시키는 폐쇄된 공간에서, 12인의 배심원과 간수 한 명만이 등장한다. 시간이 흐르며 공간은 대립과 긴장으로 탁해지고, 감기에 걸린 배심원의 휴지 더미와 쓰레기가 쌓여간다. 무대의 혼란은 인물들 내면의 격동을 상징하며, 그럼에도 끝내 이 공간에서 만장일치의 결론이 도출되는 과정은 감동적이다. 협의가 치열했던 만큼, 그 결과는 더욱 숭고하게 다가온다.
배우들의 연기와 무대 연출, 조명, 의상 등은 대체로 무난했다. 보다 밀도 있는 연기와 팽팽한 호흡으로 무대를 채웠으면 하는 아쉬움이 조금 남았다. 좀 더 창의적인 무대 연출을 고민해 본다면, 더 연극적이면서 현대적인 멋진 작품으로 발전되지 않을까. 계속 응원하고 추천한다.
좋은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한다. 원작 영화를 찾아봐야겠다. 때로 진실은 용기 있는 한 사람의 ‘잠깐만요.’에서 시작되어, 그 한 사람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누군가를 통해 공명되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