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부활의 증언은 복음서 마지막에 나옵니다. 그리고 복음서의 기록은 동시에 기록되지 않아서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 복음서를 본 후에 쓴 책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떤 사건이 사실로 인정되려면 증언들이 같아야 할까요? 달라야 할까요? 저는 당연히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증언이 다르면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사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럼 같은 증언을 해야 하는 네 사람이 있었고 서로의 증언들을 보고 들었는데 다른 증언을 한다면 어떻게 생각되십니까? 정말 안타깝게도 사복음서의 증언은 모두 조금씩 다르게 합니다.
마태복음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마가복음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누가복음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요한복음
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네 명 모두 예수님의 여제자 막달라 마리아는 있지만 추가되는 사람들이 다릅니다. 모두 예수님 무덤 앞에 있었는데 생각나는 사람을 이야기하다 보니 그랬을까요?
이런 증언들은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왜 똑같이 맞추어 기록하지 않고 소신 껏 증언하고 있는 것일까요? 복음서의 저자는 자신의 역할에 충성을 다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보고 들은 사실만을 적는 것이 사명이기 때문이죠.
그럼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충격적인 사건 현장에 당신이 서있습니다. 이태원 참사 현장에 있었고 세월호 침몰하는 배에 있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무엇이 기억에 남겠습니까?
충격적인 사건 단 하나만 보이고 나머지 디테일들은 기억에서 희미해질 것입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고 모두의 증언이 같았다면 부활은 충격적인 사건이 아니었다는 뜻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전대미문의 충격적인 사건 앞에 이 사실만이 머릿속에 남고 나머지 기억들은 중요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전편에서 다른 사람들의 소생과 예수님의 부활은 다르다고 말했는데 무엇이 다를까요?
요한복음
19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누가복음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예수님은 부활의 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시며 뼈와 살이 있음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닫혔있던 문과 벽을 통과하십니다. 그리고 지난날 겪었던 상처 있는 몸을 보이셨고 그 앞에서 생선을 잡수시고 사라지셨습니다.
사람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요? 우리가 의심하고 있는 죽은 뒤에 부활의 몸을 확인시켜 줬다고 생각합니다. 벽을 통과하고 사라지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살과 뼈가 있는 몸을 보여주셨고 그 몸으로 직접 음식을 먹을 수도 있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살면서 얻은 상처와 영광들이 몸에 새겨져 있음도 함께 보여주셨습니다.
부활의 몸은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저런 말도 많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게 하시며 확인시켜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따져 묻습니다. 부활의 몸으로 예수님을 심판한 빌라도나 죽이라고 외쳤던 바리새파에게 왜 찾아가시지 않으셨나요? 그들에게 찾아갔으면 확실하지 않았겠냐고 말이죠. 저도 매우 동의합니다. 저라도 날 죽인 원수부터 생각나고 찾아갔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귀한 부활의 몸을 얻었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찾을까요? 미워하고 저주하는 원수를 먼저 찾을까요? 원수를 찾고 만나는 일은 사치일 뿐입니다.
가장 먼저 찾은 확실한 여인은 누구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이 여인은 일곱 귀신이 들린 사람으로 세상에 모든 저주를 받으며 살았던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귀신들이 다 사라졌고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성경에서 가장 큰 은혜를 입은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따랐고 제자가 되었는데, 예수님이 곧 죽을 것이라는 예언의 말을 듣고 전 재산이라고 말할 수 있는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여인입니다. 예수님의 예언과 동시에 믿음으로 먼저 장례를 치러드렸고 그것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가장 힘들고 연약할 때 모든 제자들을 무서워 도망갔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의 모든 순간을 지켜보았으며 옆에 있어 준 여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체를 옮길 때에도 누가 훔쳐가거나 버릴까봐 끝까지 안치될 때까지 옆에 있었고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무덤에 찾아왔던 여인입니다.
당신이 따르던 리더와 선생이 아무런 힘도 없고 능력과 권세가 없을 때 당신은 끝까지 옆을 지켜 줄 마음이 있습니까? 또 죽은 후에도 먼저 찾아가 옆을 지켜주실 수 있습니까?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충성은 가장 연약하고 아무런 힘도 능력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 되었어도 나도 아무런 힘이 되진 않지만 옆에 있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귀한 시간과 몸을 이 여인에게 찾아가는 곳에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온화한 표정과 말로 "안녕~ 잘 지내고 있니?" 라고 아침 인사를 하셨습니다.
바로 몇일 전 엄청난 사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안하셨고예수님이 처음 시진ㄱ하셨던 갈리리에 먼저 찾아가셨고원수들은 찾아가지도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충성과 평안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충성된 자인가요?
어제 일어난 분노와 억울함이 오늘 아침에는 평안하신가요?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이며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행동과 말씀을 통해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활을 어제의 분노와 억울함이 오늘은 처음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가 평안하냐고 물을 수 있은 마음이며 능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