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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준 Dec 29. 2018

[review]임현 고두

거울로서의 윤리선생

이 리뷰는 스포를 포함합니다.


마땅히 지켜야할 것을 윤리가 아닌 이익의 문제로 접근하는 한 남자가 있다. 아버지처럼 부끄럽게 살고 싶지 않다고 외치지만, 먼 훗날 자신과 여제자에게서 생긴 아들에게 자신의 치부를 처절하게 변명하는. 그 남자는 임현의 단편소설 '고두(叩頭]:머리를 조아리다라는 뜻)'의 등장하는 '윤리선생(화자이며 동시에 주인공인)'이다.


도덕적인 태도를 지키며 산다는 건 몹시 귀찮은 일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고 자신의 행동을 매번 반성한다는 것이다. 이기적인 본성을 되도록 숨기며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협조하고 그러지 않을 경우 사회적 보복을 감수하는 것. 그런 최소한의 약속마저 지키지 못한다면 애당초 가까이하지 말아야 할 부류라고 생각한단다. 무엇보다 설득이 되지 않는 존재들이지. 좀처럼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거든. '저기요'라니, 어디서 식당 종업원에게나 쓰는 호칭으로 나를 부루는 거냐고 지적한다면 지금 종업원을 비하하는 거냐고 오히려 반격할 만한 족속들이지. 대신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바쁜데 미안하구나."


예의 없는 여고생에게 혼내는 대신 사과하고 쉽게 넘어가려는 선생, 이익을 위해 윤리와 예의를 장착한 인물이 바로 소설의 화자 윤리선생이다. 소설은 그의 가치관을 그대로 보여주는 독백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는 예의 없는 사람을 보며 그 누구보다 자신이 예의있다고 '안심'하며 또 '확신'한다.


나는 너와 달리 무례한 인간이 아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할 줄 알고 도리를 지킨다는 인상을 상대방에게 심어주려는 목적에서였다. 그게 더 근사한 일이라고. 내가 더 멋있다. 무슨 잘못을 진짜 하긴 했는지, 그걸로 미안한 감정을 가졌는지의 여부는 아무 상관 없단다. 핵심은 그런 말을 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뿐이거든 나는 그걸 중요하게 생각한다. 가식적이라고? 진정성이라든가 진심 같은 말을 나는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그걸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겠니? 진짜는 머리를 조아리는 각도, 무릎을 끊는 자세에서 오는 것들 아니겠니?

그는 내면의 진정성을 우리가 알 길은 없다고 말하며, 대신에 머리를 조아리는 각도, 무릎을 끊는 자세 같은 외면적 태도가 중요함을 누누히 강조한다. 하지만 이후 보이는 예의는 형편 없었지만, 누구보다 깊은 내면을 가진 제자 '윤주'가 그에게 진정성을 보이며 의지하자 그는 그녀에게 빠져 버린다. 하지만 이후 윤주와의 관계를 통해 그녀가 임신했음에도 그는 자기옹호에만 몰두하고 어떻게 하면 자신만은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까 고심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윤주가 보여준 사과와 진정성을 자신을 파괴시키려는 계략(그의 피해망상)으로 확신까지한다.


오히려 상대를 부도덕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들,
그것이야말로 윤리적인 삶에서 가징 경계해야 할 적이란다.
그런데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것이냐?
뭘 묻고 싶은 거냐?
그래서.
잤냐고?
그렇게 묻는다면 나도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단다.
(중략)
진정성이란 게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것으로부터 실체를 찾으려 할 테지만 그러나 그것은 형식 외에 아아무것도 아니었단다. 왜 함부로 내게 미안해하는 것이냐. 나는 그런 사과를 받고 싶지도 않고 무얼 용서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나쁜 의도. 나를 몰락시키려는 의지만 있었을 뿐이다. 내 학생이었다. 그걸 내가 가르쳤거든. 나를 사랑한 배덕한 학생.


인간은 태초부터 이기적이라는 남자. 예의는 이익을 위한 수단이며, 타인에 대한 행동은 끝까지 의심하고 피해망상적으로 해석하던 남자. 윤리선생은 그런 인물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런 사람을 주인공으로 더구아나 윤리선생으로 설정했을까? 그걸 통해 무얼 말하고자 한 것일까? 개인적으로 윤리선생의 말은 어느 부분에서는 인간존재의 본질을 건드렸다고 생각한다.


사회생물학계의 명저, 리처드 도킨슨의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는 '이기적 이타주의자'라는 말이 나온다. 사실 호의라는 마음은 생존을 위해 진화했을 가능성이 높고, 실제로도 생물 집단들 중에서 이기적인 개체보다는 이타적인 개체들이 생존에 유리해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집단에서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이타성을 실천하는 진화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물론 도킨슨의 이런 사회생물학적 설명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살다보면 인간사회에서 이타성의 위력(개인의 평판을 키우거나 무너트리는 위력)을 자주 깨닫는다. 예의와 선한 행동은 내 좋은 평판을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주고 집단에서 내 신뢰도를 키워준다. 그에반해 이기적 행동은 공동체에서 철저하게 보복(불신과 비협조, 뒷담화)당한다. 내 손해를 만들지 않는 범위내에서 이타성은 분명한 이익이 된다.


하지만 소설 속 윤리선생이 취했던 의심의 총구들은 타인이 아닌 본인을 향했어야 한다. 의심의 총구가 타인을 향할 때 불신은 쌓이지만, 그 총구가 나를 향할 때 분명 총알은 성장의 촉진제가 된다. 나를 향한 의심(성찰에 가까운)은 직설적인 질문들과 함께 해야한다. "과연 내가 질서를 지키고 윤리적으로 살고자 하는 것은 타인의 시선만을 위해서는 아닐까?" "그렇다면 누군가의 감시가 없는 곳에서 우리는 질서를 짓밝고 배덕하지는 않을까?" "나는 과연 저 '배덕자'를 욕할 자격이 있을까?" 그렇기에 나는 윤리선생을 쉽사리 욕할 수 없다. 어쩔 때는 연민의 마음까지 생긴다. 자신이 실천하는 윤리를 엄격하게 의심하고 또 나의 위선을 의심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좋은 거울이 된다. 문뜩 거울에 비친 모습이 "윤리선생 같은 위선자"일 수 있음을 우리는 끝 없이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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