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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준 Dec 22. 2018

[review]이스턴 프로미스

미적인 누아르 또는 휴먼 드라마.

*주의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1. 누아르 장르로서의 미장센(mise en scene)


미장센(mise en scene)은 본래 연극무대에서 쓰이던 프랑스어로 ‘연출’을 의미한다. 영어로 표기하면 'Putting on Stage'로 직역하면 '무대에 배치한다'란 뜻이다. 연극을 공연할 때 희곡에는 등장인물의 동작이나 무대장치, 조명 등에 관한 지시를 세부적으로 명시하지 않으므로 연출자가 연극의 서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무대 위에 있는 모든 시각 대상을 배열하고 조직하는 연출기법을 말한다.

- 두산백과 참고


비고 모텐슨(반지의 제왕 속 아라곤으로 유명한 배우이다)은 동일 감독의 전작 "폭력의 역사(2005)"부터 이 영화까지 극 중 인물에 최대로 몰입함으로써 장르적 미장센을 최대화한다. 감독의 현실적이며 미학적인 연출과 극에 100% 몰입하는 배우가 만났을 때 극의 미장센은 극을 달한다.

이스턴 프로미스의 니콜라이는 반지의 제왕 아라곤과 동일한 배우이다.
패밀리의 가족모임
니콜라이의 사우나 전투씬
패밀리가 되기 위하여, 문신을 통해 삶을 설명하는 면접

비고 모텐슨(반지의 제왕 속 아라곤으로 유명한 배우이다)은 동일 감독의 전작 "폭력의 역사(2005)"부터 이 영화까지 극 중 인물에 최대로 몰입함으로써 장르적 미장센을 최대화한다. 감독의 현실적이며 미학적인 연출과 극에 100% 몰입하는 배우가 만났을 때 극의 미장센은 극을 달한다.





#2. 선악의 경계에 선 인물들


셰몬과 그의 손녀들
키릴과 니콜라이
삼촌 스테판과 가족들

셰묜은 손녀에게 바이올린 연주를 직접 알려주며, 이웃을 사랑하는 따듯한 마음씨의 노인이지만 동시에 14살 소녀를 강간하고 자신의 피가 섞인 갓난아이조차 쉽게 죽이고자 하는 무자비한 인물이다.


키릴은 자신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동료를 청부 살해하고, 그 시신에 침을 뱉는 냉혹한 인물이지만 갓난아기를 죽이라는 아버지의 명령은 차마 따르지 못하고 울며 주저한다.


삼촌 스테판은 인종적 성적 차별 발언을 난무하여 가족에게 마음의 상처 입히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죽은 소녀를 위해 마피아에게 침을 뱉는 등 거대한 폭력 앞에서도 부당한 일에 분노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평범한 이야기는 선인과 악인을 규정하고 인과응보를 강조한다. 하지만 그에 반해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작품들은 인간 내면에 선과 악을 공존시키며 그에 대한 판단을 독자들에게 전적으로 위임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1866)' 에서는 살인 이후 자선을 베푸는 라스콜리니코프가 그랬다. 빅토르 위고의 작품 '레미제라블(1862)'의 등장하는 불쌍한 인물들은 모두가 그랬다. 또한 스트븐슨이 쓴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1886)'의 지킬 박사는 선(지킬)과 악(하이드)을 놓고 매번 고뇌한다.




#3. 인간 내면에 대한 희망


결국 아이는 구해낸다.

영화에 제목은 이스턴 프라미스(Eastern Promises) 우리 말로는 '동방약속'이 된다. 영화의 제목과 갓난아기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처진다는 점에서 영화의 서사는 어떤 유명한 이야기와 닮아있다. 바로 성경 마태복음 속 아기 예수의 탄생 스토리다. 심지어 영화 속 여자 아이의 이름은 크리스티나이다. 이 이름의 기원은 라틴어인데, 의미는 '그리스도의 신도'라는 뜻이다.


성경 마태복음 속에서도 갓난아이인 예수의 탄생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펼쳐진다. 예언에 등장한 아이를 죽이고자 하는 대왕 헤롯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동방박사들의 도움 속 아기 예수는 안전하게 살아남는다. 살아남은 아기 예수는 결국 메시아로서, 남은 인류에게 인간 존재의 대한 희망으로 자리 잡는다.    


마찬가지로 인간 존재에게 사람에 대한 마음은 끝까지 남아있음을 이 영화에서는 꾸준히 역설한다. 니콜라이는 자신과 불가피하게 관계를 맺은 매춘부에게 돈을 쥐어주고 버티어야 함을 설득한다. 키릴은 결국 아이를 죽이란 명령에 울며 주저하고, 그 덕분에 마태복음의 아이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 속 이 아이(크리스티나)는 안나의 가족에게서 (마치 희망적 미래를 암시하듯)잘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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