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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진 Feb 11. 2022

파리의 도심을 걷다

도심 속 사슴이 다니는 녹색 오솔길에 대하여... 

프랑스로 온 지 약 일 년 만에 파리에 입성을 하였습니다. 일 년 전, 유럽에 살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설렜던 저였지만, 다른 도시도 아닌 파리라는 유럽을 대표하는, 아니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도시 중 한 곳에 살게 되었다는 설렘은 이전 것의 몇 배 아니 수십 배는 되는 듯합니다. 


유명세만큼이나 파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도 무척 많습니다. 영화광이 아닌 저 마저도 살면서 몇 편은 본 적 있을 만큼 파리를 다루거나 배경으로 등장하는 영화는 셀 수 없이 많죠. 그중 몇몇은 명작으로 손꼽히며, 또 도시의 풍경을 잘 그려낸 영화로 추천되곤 합니다. 건축을 전공하는 저에게 '도시'라는 개념은 '건축' 그 자체 못지않게 중요한 존재입니다. 제가 지금 하는 혹은 앞으로 해 나갈 건축들이 모여서 그 도시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죠. 단순히 생각하면 건축의 집합이 도시일 수 있지만, 도시는 그 이외의 다양한 요소들이 함께 어우러져 완성됩니다.


영화 '비포 선셋' 중.

파리의 도시 풍경을 잘 그려낸 영화 중, 제가 기억하고 있는 영화 중 하나는 '비포 선셋'입니다. 비포 시리즈라 하여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까지 세편으로 이어지면서 각 편별로 젊은 시절, 조금 나이 든 든 시절, 또 그 후의 시절의 연인인 듯 연인이 아닌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그린 독특한 방식의 시리즈 중, 중간 단계에 해당하는 작품입니다. 해당 편을 보다 보면 오랜만에 재회한 두 남녀가 파리의 곳곳을 다니며 이야기를 하며 감정을 교류하는 장면들을 볼 수 있는데, 그중 도심 속 매우 특별한 장면이 하나를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두 남녀가 도심 속 어느 한 계단을 올라 좌우로 나무와 풀이 가득하고 쉴 수 있는 벤치로 잘 꾸며진 산책로 향하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말 그대로 산책을 하며 이야기를 이어가죠. 


도심 속에서 계단을 오르니 등장하는 것이 산책로인 것도 신기하지만, 마치 시골의 오솔길을 닮은 듯 흙과 나무와 풀로 잘 꾸며져 있다는 일반적인 도시의 구성을 생각하는 저에게는 특별하게 느껴졌습니다.




서두가 길었는데, 오늘은 이 산책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프랑스의 것이니 불어로 된 정식 명칭을 소개드리며 글을 이어가 보겠습니다. 이름은 "Coulée verte René-Dumont". 발음을 적자면 꿀레 벡뜨 흐네 듀몽. 뜻을 풀면, 꿀레는 사슴이 다니는 길, 혹은 오솔길을 의미하고, 벡뜨는 녹색의 지칭, 흐네 듀몽은 어느 환경운동가의 이름입니다. 누군가를 기리기 위해 붙은 이름을 제외하면, '녹색의 사슴이 다니는 오솔길'이 되는 것입니다. 도심 속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산책로의 이름치곤 상당히 낭만적이며 문학적인 느낌을 풍기는 것이 프랑스의 감성과 맥을 같이 합니다. 이 산책로는 제가 살게 된 파리의 12구 안에 함께 위치하고 있어 어렵지 않게 가볼 수 있었기에, 영화에서 느꼈던 감성을 안고 건축적, 도시적으로 어떤 인상을 주는지 바로 확인이 하기 위해 그곳을 향하였습니다..



제가 한국에서도 자주 가던 곳 중 하나인 '경의선 숲길'입니다. 그곳을 보통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를 벤치마킹했다곤 합니다. 폐철길을, 시민을 위한 공원으로 만든 취지가 같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하이라인의 벤치마킹 대상이 바로 이곳, '꿀레 벡뜨'입니다. 우리나라의 것은 2010년도 중반부터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고, 미국의 것은 2009년도 즈음에 완성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프랑스의 것은 1993년도에 완료된 것으로 우리에 비해 20년, 미국에 비해서도 10년 가까이 앞선 선구자인 셈이죠. 굳이 '먼저'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앞서 함으로써 그 존재가 도시에 머문 기간이 길다는 것은 순서를 따지는 것과는 사뭇 다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 굳이 그것을 짚었습니다. 


제가 유럽으로 삶의 터를 옮기고 난 후, 요즘 주의 깊게 보는 현상 혹은 느끼는 건축적 특징 중 하나가 '일상화된 공간'에 대한 것입니다. 이미 발코니에 관한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일상화된 공간에 대한 인식 수준으로 인한 건축적, 도시적 결과가 매우 달라질 수 있음을 몸소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소개의 대상 역시 그가 이곳에 머문 시간이 긴 만큼 제가 느끼기엔 이미 시민들의 생활의 일부로 자리매김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꿀레 벡뜨'는 파리의 12구를 동서로 가로지르며 뻗어 있습니다. 4.5km에 달하는 길이를 갖고 있는 이 산책로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폐철길을 재생한 사례입니다. 그 이유로 산책로의 형태는 어느 부분은 도로 상부를 지나는 고가의 형태를 또 어떤 부분은 지면 아래를 지나는 터널의 형태를 띠는 기존의 철도의 시퀀스를 그대로 담은 채 공원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포 선셋 영화의 한 장면처럼 계단을 통해 공원으로 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꿀레 벡뜨을 동서로 나누는 중간 지점의 공원. 서쪽 방향으로는 사진 속 다리로부터 시작함.


주로 이와 같은 입체적인 모습의 공원은 산책로의 중간 지점인 공원을 중심으로 서측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옛 철도였던 산책로 혹은 공원은 지상의 차도를 가로지르는 것은 물론 건물과 건물 사이를 지나기도 하기 때문에 산책로가 된 현재에는 도심 속 공중을 걷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잘 꾸며진 화단, 혹은 정원과 함께 조성돼 있기에 시민들은 빌딩 숲이 아닌 흡사 숲을 걷는 체험을 하게 되죠. 이와 더불어 곳곳에 마련된 휴식 공간과 파리의 아티스트와 협업된 듯 조성된 다양한 공간과 요소들은 이곳이 파리의 일부임을 몸소 느끼게끔 돕습니다. 평일 낮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산책로 곳곳에 지면과 연결된 계단, 엘리베이터 등을 이용해 산책로 안과 밖을 드나듭니다. 낯설지 않게, 평소와 같이 공간을 누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이곳 역시 이들에게는 일상의 한 부분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람과 도시를 구경하며, 도심 위를 걷다 보면 문득 발아래에선 무슨 일이 있을지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산책로의 서쪽 끝에 다다른 저는 곧바로 내가 걷던 아래에는 무엇이 있었는지를 확인했죠. 역시나 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파리는 산책로의 하부, 즉 과거의 고가 철도의 하부 공간을 우리말로 하면 '예술의 고가도로'라는 명명 하여 실제 예술공방들이 모아놓았습니다. 흔히 유행처럼 지자체에서 행하는 예술가들을 위한 공방 조성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만, 그렇다기엔 이미 자리 잡은 지 한참은 지난 모습과 실제로 그 기능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며 의심을 거두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이미 꿀레 벡뜨는 파리의 일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한편, 공원을 중심으로 동측으로는 산책로는 지면으로 내려와 우리나라의 경의선 숲길과 같이 도심과 그대로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동쪽을 향해 진행하면서 점점 지면 아래로 내려가며 반대 측면에서 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풍경. 조금은 더 자연에 가까운 공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흙길과 무성한 나무 사이로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으며, 건물과 건물 사이를 가까이 지나던 모습과는 달리 주택 단지 사이 혹은 도로 사이를 넓게 지나며 다른 분위기를 갖습니다. 최종적으로는 파리의 동남쪽의 녹지를 담당하고 있는 방센느라는 이름의 공원에 다 달아 이 산책로는 끝이 납니다.

꿀레 벡뜨의 동쪽 부분 초입과 산책로가 지나는 터널들.


서쪽으로는 도심의 일부로 그 기능과 형태가 입체적으로 녹아든 공원의 모습을 보았다면, 동쪽으로는 도시의 녹지 공간으로서 그 조직과 쓰임이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도시에 접착되었다는 표현으로 굳이 두 부분을 나누어서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조금은 다른 두 부분 모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파리라는 도시와 하나가 되어 있음은 확실합니다. 

꿀레 벡뜨의 마지막, 방센느 공원. (Bois de Vincennes)


이제 겨우 한 달 남짓 파리살이를 시작한 제가 이곳의 역사를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시작은 모르지만 현재 보이는 현상만을 보았을 때, '꿀레 벡뜨'를 통해 제가 알 수 있는 것은 어느 한 건축가 혹은 도시계획가나 그들의 집단에 의해 제안되었을 공간이 그동안의 시간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시민들에 의해 도시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일상의 공간도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 제안되었을, 혹은 창조되었을 공간일 수 있음을 다시 상기하며 앞으로의 우리가 누릴 일상의 공간에 대한 고민을 한 번 더 해보는 시간을 가져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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