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33.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어진다

『도덕경』 20장 “절학무우(絶學無憂)”

by 구범 강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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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을 읽어가다 보면 참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공자는 “스스로 배워서 알았다”고 말하며 배움을 강조한다. 그래서 『논어』 1편1장도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로 시작한다. 즉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배우고 제때에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이다. 그런데, 『도덕경』에는 배움을 경시하는 구절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도덕경』 20장은 “절학무우(絶學無憂)” 즉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사라지다’로 시작한다. 또한 『도덕경』 3장에서는 “상사민무지무욕(常使民無知無慾)” 즉 ‘늘 백성들로 하여금 무지하고 무욕하게 하라‘고 한다. 언뜻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된다. 노자는 우민화(愚民化)정책을 선호한 것인가 하는 오해가 일어나기도 한다.


오래 전에 봤던 도올의 책에서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면서 도올의 결론은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지식을 쌓아야 한다. 왜냐하면 지혜는 뺄셈이고 지식은 덧셈이라는데, 더해 쌓인 게 있어야 뺄 수도 있지 않느냐는 논리였다. 공감과 수긍이 갔다. 실제로 『도덕경』 48장에서도 “위학일익 위도일손(爲學日益 爲道日損)”이라는 말이 나온다. ‘학문 즉 배움을 위해서는 매일 더해야 하지만, 도를 위해서는 매일 덜어내야 한다’고 했다. 노자는 도를 강조하기 때문에 뭔가 더 채우기 보다는 더 덜어내기를 바라고, 그런 차원에서 절학(絶學)과 무지(無知)를 바라보면 이해 못할 바도 없을 것 같다. 각자가 살아가는 삶은 모습도 너무나 다양하고 차원도 모두 다르다. 그래서 각자가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고 이해도 다르다. 똑같은 단어라 하더라도 어떤 맥락에서 쓰이는지에 따라 해석도 달라진다. 절학무우(絶學無憂)”는 도대체 어떤 차원일까?


미국 일본을 비롯하여 서양 세계에 한국 불교를 전한 혁혁한 공헌자가 바로 숭산(崇山, 1927-2004) 스님이다. 그 분은 살아계실 때, 달라이 라마 등과 함께 살아있는 생불(生佛)로 추앙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그 분이 불교를 알리기 위해 서양에 던진 화두가 바로 “오직 모를 뿐”이었다. 동양의 무(無)사상이 서양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지... 세계적인 역사가이자 문명비평가인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 1889~1975)는 “불교가 서양에 전파된 것은 20세기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실 현대인들은 너무 많이 안다. 아는 것이 힘이 될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아는 것이 병이 될 수도 있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 떠오른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생시에 생불로 추앙받던 숭산 스님의 “오직 모를 뿐”과 동양정신의 양대 산맥으로 존경받는 노자의 “절학무우(絶學無憂)”는 비움과 치유의 큰 울림으로 들려온다.


“이제는 AI 사피엔스 시대에 우리가 꼭 알아야만 하고, 또 진정으로 알 필요가 있는 것은 무엇일까?”


『21세기 노자 산책』은『도덕경』 81장 속 보물 같은 구절들을 오늘의 언어와 감성으로 풀어낸 고전 산책 에세이입니다. 삶에 지친 이들에게는 쉼표가 되고, 방향을 잃은 이들에게는 물 흐르듯 나아가는 길이 되어줄 것입니다. 특히, 전문 CEO에게는 "무위경영(無爲經營)"의 깊은 통찰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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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범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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