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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 성과 예술Ⅰ

by 청사

성의 자유는 성을 깨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현상을 깨는 것을 의미하는가? 반대로 성의 억압은 성을 지키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현상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가? 신의 섭리는 성을 억압하고, 인간의 섭리는 성의 자유를 갖는 것인가?

르네상스의 중심에 있던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와 그의 작품을 눈앞에 두고 예상치 않는 큰 혼란에 빠졌다. 예술가로서 역사에 이름을 새겼다는가, 작품을 남겼다든가, 돈을 먹은 하마에서 황금알을 낳은 거위가 되었다든가, 예술을 통해서 최고의 삶을 누렸다든가 하는 예술가로서의 성공적 여정과 동경 때문이 아니었다.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 앞에서 ‘예술에서 성은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라는 질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성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사회에서나 동양사회에서나 일정하게 금기시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성이 신성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양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켈란젤로 작품에서는 성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추적하고 싶었다. 경쟁자 다빈치는 미남이었고 미켈란젤로는 이른바 추남에 속한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다. 미를 기본 바탕으로 하는 예술가 미켈란제로에게는 치명적인 콤플렉스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향유하든지 아니면 극복하든지 하는 선택에 직면했을지도 모른다.

미켈란젤로는 어린 시절 코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고, 추남의 인상에 다가 넝마 같은 옷과 대리석 가루를 뒤집어쓰고 다녔기에 신체적 매력을 발산하지 못했다. 그에 비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잘생긴 외모와 화술로 인기가 많아 젊은 추종자를 끌고 다녔다. 위대한 예술가 그들은 삶에서 질투하고 예술에서 경쟁하는 관계에 있었다.

일화에 의하면,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를 비판하기 위해서 ‘회화는 사람의 눈을 속이는 수작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조각만 못하다’고 혹평을 했다. 화가 레오나르도는 미켈란젤로를 비판하기 위해서 ‘조각가의 모습은 마치 머리에 빵가루를 뒤집어쓴 제빵사 같다’고 평가 절하했다.

그러나 그들은 남성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예술가로서 미소년들에게 끌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이 살아가던 르네상스와 피렌체에는 문예부흥이라는 새로운 사조가 재생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나면서도 성에 대한 인식도 제한적이었지만 일부 층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그들은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성인과 소년 간의 동성애(Greek love)가 일반적인 사회 현상이었다. 그 현상은 예술품이나 저작 활동, 신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동시에 성관계 대상으로서 동성이나 이성에 대한 성적 집착이라기보다는 나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른 남성 간의 사랑법이었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와 가니메데스의 관계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전형적인 동성애로 나타나면서 하나의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플라톤(Plato)은 금욕적이고 경건한 관념적 삶의 태도를 강조하면서 그리스도교와 함께 유럽인들의 인생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저서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의 동성애에 대해서 언급했다.

남자와 여자와 관련된 사랑에 관한 순수성과 왜곡성을 폭로한 플라톤은 “여자와의 사랑은 번식이라는 본능에서 나오는 불순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번식이 불가능한 미소년과의 사랑이야말로 본능이 가미되지 않은 순수하고 진정한 사랑이다”라고 했다. 그의 내부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예찬이 자리하고 있었다.

르네상스는 인간에 대한 재발견뿐 아니라 고대의 자유분방했던 관능을 소생시킨 재생의 시대였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인간의 금욕과 절제하고 천국을 위해서 사회적 악과 싸울 것을 명령하였다. 따라서 그리스식 사랑법은 결코 종교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동성애는 극형에 쳐해 지는 중죄였던 것이다.

따라서 폐쇄적인 궁정 사회, 일부 시민 사회,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 등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엄격한 동성애 금지 현상은 문예부흥과 함께 인간의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움직임을 꺾지는 못했다. 영국 극작가 셰익스피어와 말로위, 이탈리아 화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카라바지오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피렌체는 동성애로 유명해서 독일에서는 ‘남색’을 의미하는 ‘프로젠체’로 불렀고, 피렌체가 성직자들의 남색 때문에 몰락할 것이라고 했다. 피렌체 지식인들은 플라톤이 제시한 육체적 관계가 아니라 정신적 관계를 중시하는 교제방식을 의미하는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를 숭상했다. 그런 개념은 플라톤의 <향연>(symposium)에서 성인남자와 소년 사이의 정신적 유대로 표출되었다.

시대성을 담고 있던 신플라톤주의 철학에서는 ‘예쁜 것이 착한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르네상스 예술을 주도했던 많은 예술가들은 동성애에 빠졌었다. 또한 아름다운 여인을 묘사해야 하는 작업에도 미소년을 모델로 작업했다. 신플라톤주의 학자 피노치(Marsilio Ficino)는 플라토닉 러브가 사람들을 천국과 같은 숭고한 곳으로 데려다준다고 설파했다.

당시 동성애는 지금처럼 동성 간의 육체적 관계보다는 남자끼리라 하더라도 중년 남성과 젊은 청년 혹은 소년 간의 정신적 유대관계가 대부분이었다. 여성과의 성적 관계는 육체적 관계이므로 정신을 타락시키고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했다. 반면 동성애는 고대의 순수함에 다가갈 수 있는 통로로 숭고하게 여겼던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독신으로 예술 활동에만 전념하면서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그런 삶 속에서 게라르도 페리니, 페보 디 포기오와 같은 젊은이들을 작품활동의 조수로 삼았고, 무덤을 디자인한 브라시(Cecchino dei Bracci), 시스티나 예배강의 찬장에 일하면서 만난 피스토리아(Giovanni da Pistoia) 등과 같은 청년들을 교제하며 내면에서 자라고 있는 남성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담은 소네트(Sonnet)를 썼다.

1532년 57세가 된 그는 23세의 멋진 귀족 청년 토마소 카바리에리 (Tommaso dei Cavalieri, 1509-1587)를 소개받으면서 사랑에 빠졌다. 그는 300편이 넘는 작은 노래를 의미하는 유럽 정형시 소네트와 성과 관련된 드로잉을 선물하였습니다. 그중 한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너만을 사랑하기에

내 신사여. 흥분하지 마오.

너에게서 깊고 크게 사랑하는 것은

한 사람이 타인의 정신에 포획되는 것으로.

내가 진정 원하는 것.

너의 자태에서 피어나는 것은 인간의 정신으로는 난해하네.

제발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하네.”


미켈란젤로가 남긴 조각이나 회화에는 남성상이 잘 드러나 있다. 남성을 조각하고 그림으로 형상화하고, 예술적 작업과 미소년과의 밀착된 접촉으로 인하여 동성애자로 인식되었다. 동성애자였던 교황 율리오 2세의 연인은 비서였던 프란체스코 알리도시 추기경과 미켈란젤로였다. 특히 미켈란젤로와 토마소는 회화작품을 통해서 맺은 스승과 제자로서 그들의 애정은 32년간 지속되었고 최후의 죽음도 평온하게 그의 팔에 의탁했던 것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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