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지향하는 최고의 세계는 어떤 것일까? 철학의 세계이다. 예술의 세계이다. 종교의 세계이다. 철학은 인간의 본질을, 예술은 인간의 이상을, 종교는 인간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좋은지 바티칸에서 실마리를 찾아볼 생각이다.
바티칸은 철학과 예술을 종교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종교가 혼자서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르네상스의 혁명을 가속화하기 위해서 종교의 군주로서 교황 율리오 2세와 레오 10세와 같은 종교가, 철학의 군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 예술의 군주로서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와 같은 예술가 등이 있었다.
예술의 중심에 있던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da Urbino)의 작품이 있는 「서명의 방」 앞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활동하고 있는 피렌체로 이주하면서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비롯한 많은 작품을 제작했고, 레오나르도의 화실을 방문해서 <모나리자>(Mona Lisa)를 스케치했다.
종교의 중심에 있던 교황 율리오 2세는 라파엘로를 로마로 불러 궁전에 예술을 불어넣기 위해서 프레스코(Fresco)화를 그리도록 했다. 라파엘로의 방이라고도 불리는 그곳은 교황이 형벌이나 사면, 교회 재판소 문서에 날인한 「서명의 방」, 교황을 알현하는 「엘리오두루스의 방」, 교황의 개인식당 「보르고의 화재의 방」, 교황이 외부인사를 초청하여 파티를 여는 「콘스탄티누스 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철학의 중심에 있던 그리스 철학자들은 라파엘로에 의해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의 벽화로 스며들었다. 벽의 아치 내부에는 신학으로서 <성체논의>(La Disputa del Sacramento), 철학으로서 <아테네 학당>(La Scuola di Atene), 시학으로서 <파르나소스>(Il Parnaso), 법학으로서 <신학적 덕>(Le Virtù e la Legge) 등이 그려져 있다. 철학적 지식과 예술적 미학과 종교적 규율을 담아냈다.
그중에서 유명한 <아테네 학당>은 20여 명의 고대 그리스 학자가 학당에 모인 것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다. 손가락으로 자신의 주장을 설파하는 소크라테스, 이상주의자로서 하늘을 가리키는 플라톤, 현실주의자로 땅을 가리키는 아리스토텔레스, 그들의 말에 매료된 알렉산더 대왕, 알렉산더 대왕에게 햇볕을 가리지 말라고 한 디오게네스, “모든 것은 흐른다”라는 신념으로 만물의 이치를 파악하려 한 헤라클레이토스, 사랑을 예찬한 미켈란젤로, 미학적 탐미자 라파엘 등이 르네상스의 지적 정체를 밝히고 있었다.
예술사적 관점에서 보면, 고전 건축의 균형감각과 질서, 원근법을 적용한 입체성과 선명성, 부분과 전체의 조화, 태피스트리(tapestry)작법, 프레스코(Fresco)화법 등이 뛰어난 미술의 걸작이다. 사상사적 관점에서는 신학, 철학, 법학, 시학 등이 지성의 시대를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종교사적 관점에서는 예술과 철학이 성령의 보호 하에 성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예술과 철학과 종교 간의 화해와 화합이다.
그리고 라파엘로는 바티칸 박물관과 라파엘로의 방을 연결하는 복도 1층 중앙 돔과 2층을 그림으로 장식했다. 그리하여 복도는 「라파엘로의 로지아」(Loggia di Raffaello)라고도 불린다. 고대, 자연, 예술, 철학, 건축, 종교 등이 조화를 이루며 아치형 창에 화려한 꽃과 동물이 그려져 있다.
교황 레오 10세(Leo X, 로렌초 메디치)에 의해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책임자로 임명되는 등 왕성하게 바티칸을 예술로 수놓았던 라파엘로는 <그리스도의 변용>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1520년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일인 성금요일(Good Friday)에 사망했다.
심신의 안식처가 된 판테온의 라파엘로 묘비에는 레오 10세의 비서이며 학자였던 친구 피에트로 벰보(Pietro Bembo)의 묘비문이 있다. 즉 ‘Ille hic est Raphael timuit quo sospite vinci, rerum magna parens et moriente mori.’(여기는 생전에 어머니 자연이 그에게 정복될까 두려워 떨게 만든 라파엘로의 무덤이다. 이제 그가 죽었으니 그와 함께 자연 또한 죽을까 두려워하노라).
라파엘로 서거 500주년을 기념해서 그의 생애와 작품을 다룬 영화 <라파엘로, 예술의 군주>(Raphael, The Lord of the Arts)가 2017년 90분짜리로 제작되었고, 2024년 5월 한국에서도 개봉되었다. 루카 비오토(Luca Viotto) 감독, 플라비오 파렌티 (라파엘로 역), 엔리코 로 베르소 (조반니 산티 역) 등이 출연하였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로 약 20여 개 장소와 50여 점 작품에 대해서 해상도를 높이는 4K 방식으로 촬영했다. 특히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바티칸 시국의 사도 궁전에 있는 「라파엘로의 로지아」를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했다. 이 영화에서는 영상 속에서 건축과 회화가 시공간적으로 승화되면서 예술의 군주로서 라파엘로의 생명을 다시 소환했다.
나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타인이 만든 것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다. <王彦章傳>에서는 ‘虎死留皮人死留名’라고 했던가? 예술가는 작품을 남기고, 철학자는 명언을 남기던가? 그런 위대한 인생을 따라 하기에는 이미 천양지차로 많이 어긋나 있다. 백번 양보하더라도 ‘내 삶의 군주’라고 불러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