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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 최후의 심판

by 청사

베드로 대성당광장에 서서 잠시 뒤를 돌아봤다. 바티칸 시국을 성스럽고 신비롭게 하는 베드로 대성당, 바티칸 박물관, 교황 등의 존재 이유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영역을 초월하여 신의 세계를 구축한 역사 현장에서 신과 인간과 예술 간의 관계가 담고 있는 의미를 생각했다.

성서에서만 존재하는 신과 신이 구상하는 세계에서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예술적 답변을 한 석상이나 회화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천지만물을 주관하는 신의 섭리, 위정자들의 통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창조주의 구제, 철학적 사고, 종교적 신비, 예술적 미학 등 다양한 동기부여로 그려진 예술품에는 신과 신의 세계에서 ‘어떻게 되는 인간’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성서에서 신과 인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구속(救贖)에 담긴 최후의 심판이다. 구속은 구원할 구(救)와 속바칠 속(贖)의 합성어로 타인의 죄나 고통을 대신하여 구원(救援)하는 일을 의미한다. 구속에 대해서 “그때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救贖)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누가복음 21:27–28)”라고 했다.

구속의 주체인 최후의 심판자는 인자를 의미하는 예수이다. 성서에서 최후 심판의 날은 여호와의 날, 주의 날, 마지막 날,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등으로 표현되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이 기대하는 미래적 구속(救贖)은 최후의 심판으로 하나님이 통치하는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사는 것이다.

예수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최후의 심판은 “그날 최후 심판의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베드로후서 3:12–13)”라는데 잘 나타나 있다. 재림에 따른 구속 조치로서 최후의 심판은 인간의 죄악이 점령하고 있는 세상을 불로 태우고, 구제받은 사람들은 천국으로 들어가고 죄지은 자들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성서가 제시하고 있는 최후 심판(Last Judgment)은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가 끝나는 세계 종말에 하나님이 악인과 선인을 심판하는 것을 말한다. 그때 모든 사람은 자기가 행한 행위에 따라 하나님의 벌이나 보상을 받게 된다. 그들은 절대 선이 있는 천국이나 절대 악이 있는 지옥으로 들어가게 된다.

최후의 심판에 따른 벌은 ‘하늘이 불에 타’라는 말로 집약되어 있듯이 악한 존재가 세상에서 불에 타 사라지고 죄인들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에 따른 보상은 죽은 자가 부활하고, 의인이 구원받아 새 하늘과 새 땅인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규정한 선(善)이 영원히 승리하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계에서 사는 것이다.

기원전 8세기 유다 왕국에 살았던 예언자 ‘주는 구원’이라는 뜻을 가진 이사야는 장차 최후의 심판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다. 이사야 24장에서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예언했다. 세상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영원한 언약을 파기하면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경고를 했다.

예언대로 심판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이루어졌다. 구약성서에서 등장하는 노아(Noah) 때는 세상에 죄악이 가득하여 대홍수로 심판을 받았다. 불이 아니라 물로 심판을 받았다. 그때 야훼의 명령으로 노아는 방주를 만들어 자신의 가족과 여러 쌍의 동물을 태워 생존하게 했다.

기원전 721년경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규정한 율법과 약속을 배반함으로 앗수르(Assyria)에 정복되는 심판을 받았다. 기원전 586년경 유다 나라가 하나님의 법과 언약에 따르지 않아 바벨론(Babylon)에 의해 멸망되는 심판을 받았다. 피지배가 되어 자유를 잃는 모습으로 심판을 받았다.

선지자 이사야에 의한 심판의 예언 일부는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직까지 성취되지 않은 예언은 장래에 완성될 메시아의 통치에 관한 부분이다.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상을 만드는 최후의 심판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언제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최후의 심판이기에 현실에서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관심이 많은 최후 심판의 날과 심판의 모습은 사실상 안갯속에 있을 뿐이다. 그런 이유로 오랫동안 예술가들은 최후의 심판을 즐거운 소재로 했다. 기독교에서 예언으로 말하는 최후의 종말, 인류의 종말, 인류의 위기 등과 같은 최후 심판의 모습에 대해서 예술가들은 예술적 상상력으로 다양하게 표현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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