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심판은 신에 의한 최후의 통첩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만큼 절대적인 선언은 없다. 권력을 잡아 독선적으로 통치를 한 이념이나 독재자도 대부분 사라졌다. 인류를 핍박하고 학살을 자행했던 행위가 악이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성서와 신에 의한 종교적 최후의 심판은 여전히 살아있다. 그 정당성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종교적 최후의 심판은 성서가 작동하면서 시작되어 아직도 진행형이다. 미술사적 관점에서 나타난 교리를 담은 최후의 심판은 서기 359년 <유니우스 바수스의 석관>(Sarcophaungs of Junius Bassus)이다. 이 작품은 10개의 영역으로 구분해서, 위쪽부터 이삭의 희생, 베드로 체포, 옥좌에 앉은 예수, 예수의 체포, 빌라도 앞의 예수, 욥의 불행, 아담과 하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 사자 굴속 다니엘, 사도바울의 순교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도상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심판자 예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특히 박해받는 기독교인들은 어지러운 세상으로부터 구원해 줄 수 있는 선하고 희생하는 구세주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가득한 시기였다. 그런 이유로 석관에서는 부드러운 심판자와 천국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최후의 심판에 나타난 지옥은 4세기경부터 로마예술의 쇠퇴로 인하여 새롭게 통제된 교회 신학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비잔틴(Byzantium) 미술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중세에는 인간의 가치보다 신의 가치를 더욱 중시했다. 인간은 한 치 미래를 볼 수 없는 우둔한 존재이기에, 오로지 신의 섭리에 기반한 금욕생활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신의 교리가 담긴 성서는 인류의 지침서와 길라잡이가 되었다.
예술에서 최후 심판의 심판자는 그리스도 이외에 많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10세기부터 12세기 로마네스크(Romanesque, Roman + Esque) 예술가들은 독수리, 사자, 황소, 날개 달린 인간 등에 둘러싸여 칼을 휘두르는 심판자를 등장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 모습은 경외로운 천국과 공포에 싸인 지옥으로 대비시켜 극단적으로 묘사했다.
그 후 천국과 지옥이라는 구도에 기초한 최후의 심판은 14세기 르네상스의 미술작품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죄를 지은 자는 처참한 지옥으로 떨어지고, 구원받는 자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프레임이 완성된 것이다. 최후의 심판 도상에는 천국과 지옥이 좌우 구조 또는 상하 구조로 대비해서 나타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선구자이자 비잔틴 양식을 극복한 화가 조토(Giotto di bondone)는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 1306년)에서 천국과 지옥을 좌우 구조로 그렸다. 여기에서는 심판자와 십자가를 중앙에 두고 세상을 천국과 지옥으로 구분했다. 중앙에는 열두 천사들에 의해 둘러싸인 심판자가 근엄하게 앉아 좌우로 손을 벌리고 있다. 천사들은 심판자 주위에서 마지막 심판을 알리기 위해 깃발을 들고 나팔을 분다.
구원을 의미하는 십자가를 경계로 오른쪽에는 심판을 받아 천국으로 들어가는 성도들이 환호하고 심판자를 찬양하는 모습이 있다. 거기에는 오로지 밝음, 평온함, 환희만이 존재하는 듯했다. 왼쪽에 있는 지옥에는 벌거벗은 채 고통으로 울부짖는 인간이 득실대고, 세상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가장 참혹하고 처절한 참상이 벌어지고 있다.
최후의 심판은 천국과 지옥이 반대편에 있어 동행할 수 없는 세계임을 확실하게 인식시키고 있다. 그리고 천국의 아름다움보다는 지옥의 참혹함을 더욱 크고 진하게 강조하고 있다. 당시 막강한 지배력을 가진 교회세력은 죄의식을 조장하여 돈을 벌고 통치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지옥도를 도구로서 활용하였다.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 사조에 영향을 끼친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1441)는 <최후의 심판>(1430년) 도상에서 천국과 지옥을 상하 구조로 구현했다. 천국을 의미하는 위쪽에는 구원의 십자가 앞에 천사들에 의해 둘러싸여 붉은 망토를 걸친 심판자가 옥좌에 앉아 두 팔을 벌려 세상을 천국과 지옥으로 나눈다. 심판자는 “오라 나의 아버지로부터 축복받은 이들이여”(Venite Benedicti Patris Mei)"라고 하여 천국에 들어설 자들을 축복한다.
하단에는 최후의 심판을 묘사하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새겨졌다. 즉 “....그들은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라고 하고 있다. 심판은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 보상으로 천국에 들어가게 하고, 벌로서 지옥으로 떨어지게 한다. 영원한 생명이나 죽음으로 갈라지는 것이 최후의 심판임을 알게 한다.
이 도상에서는 그리스도교를 통틀어 가장 강력하고 위대했던 대천사 미카엘이 칼과 방패를 들었고 그의 발아래에는 지옥이 그려져 있다. 지옥에서는 저주받은 해골의 모습을 한 영혼들이 각자 저지른 죄에 해당되는 고통을 받고 있다. 나체 인간이 거꾸로 서 있는 세상, 굶주린 괴물들이 신체와 정신을 갉아먹고 있는 듯한 세상을 그리고 있다.
네덜란드 풍속화의 대가 루카스 반 라이덴(Lucas van Leyden)의 <최후의 심판>(1523년)은 르네상스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루카스는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뒤러 등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을 참고해서 신체를 잘 표현했다. 도상의 중앙에는 아기 예수를 품고 있는 심판자가 두 팔을 벌려 세상을 천국과 지옥으로 구분한다.
이 도상에서도 사도, 성도, 천사들에 의해 둘러싸인 심판자가 천국에 가는 자와 지옥에 가는 자를 마지막 날 심판하고 있다. 오른쪽은 선택받은 자들이 온전한 모습으로 천국에 들어가 환호하고 심판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왼쪽에는 악마들이 저주받아 나체가 된 자를 지옥으로 끌고 가 괴롭히고 있다. 평화로운 천국의 매력보다는 고통스러운 지옥을 더욱 처참하게 그리고 있다.
지금까지 예술에서 그려진 최후 심판의 대상이 되는 세계는 신과 인간, 천국과 지옥, 구제와 저주, 선과 악, 믿음과 불경, 상과 벌,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 천사와 악마, 배신과 충성, 좌와 우, 상과 하 등과 같은 이분법적 구조로 되어있다. 거기에서 인간은 천국이나 지옥이라는 경계선에 서서 자기 행위에 따른 심판을 받아야 하는 숙명을 갖는 피조물에 불과할 뿐이다.
최후의 심판으로 인간은 각자의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천국을, 벌로서 지옥이라는 대가를 받게 된다. 선한 자는 승리하여 천국으로 들어가고, 악한 자는 극한의 신체적이며 정신적 고통이 있는 지옥으로 떨어진다. 선한 행동이 아름다워서 행하기보다는 악한 행동에 동반되는 참혹한 벌이 두려워 선을 선택해야 한다는 논리가 오히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나는 어설픈 가톨릭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심판에 의해 선과 악으로 구분되는 세계에서 어느 쪽에 서야 할지 충분히 잘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절대 선과 절대 악이 애매하게 엉켜있는 현실에서 ‘금단의 열매’(forbidden fruit)가 유혹하는 손길을 뿌리치는 데 종종 실패하고 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