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의식이 식민지를 경험하지 않은 나에게는 어떻게 다가왔는지를 생각해 봤다. 차별주의는 일시적으로 일어나 사라지기는 무지갯빛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먹구름이 잔뜩 껴 폭풍우와 함께 내리칠 천둥 번개를 두려워하듯이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러도 두려워해야 하는 그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출입국심사대에서의 소동, 아르바이트 구직에서의 어려움, 노동 현장에서의 눈치, 재일한국인에 대한 불평등한 처우,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괴리현상, 인권 문제와 연결된 다양한 사회운동, 반강제적인 귀화 유도 등과 같은 부정적인 직간접경험은 일본의 풍토병처럼 스쳐갔다.
다른 한편으로는 스승과의 만남, 대학에서의 평등한 기회, 시민대학에서의 활동, 친절한 사람과의 만남, 공적 기관의 원칙적 대응, 유학생에 대한 배려, 보편적 가치 준수 현상, 한국인에 대한 의식변화, 산시로 연못에서 얻은 평화로움, 이치조 마리와의 만남 등과 같은 경험치는 일본에서 재생되는 풍토병을 상쇄시키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은 불완전한 한국인으로 출발해서 점점 온전한 한국인으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에서 온전한 한국인으로서, 평등한 인간으로 대우받았다고 할 수 있지만, 대학이라는 무풍지대를 벗어나는 시점에서 ‘역시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지?’라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일본에서 ‘온전한 한국인’으로서 당당하게 활동하고 평등한 처우를 받기 위해서는 여전히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선진국 일본에 걸맞은 새로운 가치, 열린 인식, 개방된 제도 등의 관점에서 고민이 필요한 시대가 됐고 새로운 일본이 되기를 기대했다.
도쿄에서의 자신은 좋지 않은 만남보다는 좋은 만남이 훨씬 많았다는 점에서 그 나름대로 행운아였다. 이 행운은 자신이 잘 대응하고 처신한 결과라기보다는 일본에서 삶의 투쟁을 해온 재일한국인의 희망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아픔을 진실하게 인식한 일본 양심가들이 만들어낸 성과라는데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그만큼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었다.
일본 사회에서 벌어지는 직간접적인 경험에 의해 종종 머릿속이 엉클어져도 나는 흔들림 없이 직진했다. 여전히 중앙도서관 자칭 지정석에 앉아서 마지막 학기를 맞아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었다. 가끔 눈앞에 놓인 서재의 책들을 보면서 가야 할 길이 멀었고, 이따금 빼꼼하게 보이는 하늘을 보면서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묻기도 했다.
학위 이후의 삶을 어떻게 시작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헤매고 있는 모습을 간파한 지도교수는 기폭제가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자신이 원한 최상의 상황은 아니었으나 영원했던 산시로 연못이 있는 캠퍼스에서 비상근강사로 활동하는 기회를 소개했다. 대학강단에 선다는 설렘은 몸과 마음의 짓누름으로 그리고 희망으로도 다가왔다. 자신에게 감동을 주었던 강의를 회상하면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용한 나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상황이 벌어졌다. 중앙도서관 ‘우리의 지정석’으로 이치조 마리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평소 ‘황후처럼 호화롭고 부러운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학업을 지속하기 위해서 돌아왔다.’고 했다. 그녀가 다시 산시로 연못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다시 만난 기쁨보다는 어떤 사정이 이렇게 만들었는지가 궁금해 오히려 불안했다. 곁에 있어야 되는지 아니면 대면대면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녀는 전혀 변화된 것이 없어 보였고, 여전히 자신감과 생기가 넘쳤다.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연덕스럽게 스스럼없이 예전처럼 행동했다. 그녀의 마음을 확인할 필요도 없이 다시 껌딱지 동행을 시작했다.
그녀가 곁에 없었을 때 아무런 이유 없이 기다렸던 것처럼 그녀가 곁에 있을 때 이유 없이 있으면 됐다.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이나 해명 없이도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으면 됐다. 돌아온 것 그 자체만으로도 만족했기 때문이다. 이유를 듣거나 안 듣거나 설명을 듣거나 안 듣거나가 그녀 옆에 있을 것인가 아닌가를 정하는 결정인자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선택한 학업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일생동안 해야 하는 업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더욱 확신과 자신감을 가졌다. 그녀가 학업을 지속하는 것은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는 어떤 상황이 되었든 예전처럼 떠나보내는 일도 없을 것이고, 떠나게 하는 일은 더더욱 하지 않을 것이며, 떠나려고 하면 떠나지 못하게 강하게 잡을 것이라는 자신만의 독한 결기가 생겼다.
그녀는 단골이었던 선술집 쇼야(庄屋)로 안내를 했다. 우정과 사랑을 익혔던 곳이었고, 많은 추억을 남긴 곳이어서 언제나 마음 편하게 이용했던 곳이다. 일상에서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가 벽 속에 축적되어 비밀이나 거짓이 금방 탄로 나는 그런 곳이었다. 그녀와 헤어진 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동안의 결혼생활과 금기시했던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서 말을 했다. 나는 ‘이 설명이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말을 잘랐다.
“마리, 이대로 좋아.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도 돼. 네가 될 수 없지만 너로 있으려고 노력할게.”
“아니야, 그래도 이야기를 해야 해, 같이 있으려면...”
“너의 결정에 맡길게.”
“있는 그대로 말할게. 사실만.... ”
“알았어. 너무 아프지 않게 해.”
그녀는 “가업을 승계하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택한 것이 잘못이었어, 그것은 나의 길이 아니었어. 가장 큰 실수는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한 결혼이었어.”라고 말했다. 나는 “여기에서 멈추면 안 돼?”라고 급하게 중단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해야 정리될 것 같아.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말이야.”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은 부도덕하고 무책임한 행동을 반복하면서 결혼생활을 위기에 빠트렸고, 불법행위와 방만한 기업을 경영하면서 가업이 총체적 위기에 직면했어. 그는 신뢰를 잃게 되자 배신을 하였기에 아버지와 나는 최후의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리게 됐어.”라고 조용하게 말했다.
마리에게는 자신의 삶이 잃어가고 있는 일상, 가풍과 가업의 승계에 대한 이견, 결혼생활에 대한 회의, 학문에 대한 강한 미련, 자신의 의지와 멀어져 가고 있는 미래 등과 같은 고민이 한꺼번에 몰려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뜻과 자신의 뜻을 정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가 생각하는 길과 자신의 길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였기에 원점으로 돌아가 자신의 선택을 하자.’는 자기중심적 고민을 했다. 깊은 수렁에 빠진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던 부모님은 자신들의 욕심, 화족(華族)이라는 족쇄, 가업 승계와 그것을 위한 결혼이 올가미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통찰하고 그녀가 선택하도록 했던 것이다.
부모님은 가업을 위해서 전문경영체제를 새롭게 구축하였고, 가문의 승계는 멀리 보면서 결정할 것이며, 결혼생활에 대해서는 스스로 판단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부모님의 뜻을 인지한 이치조 마리는 본래 자신이 그리고 있었던 미래를 찾기 위해 결혼생활을 과감하게 정리하는 결단을 하였다.
이후 그녀는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오기 위해 잠시 영국으로 간 후 다시 있어야 할 곳으로 인식한 산시로 연못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들어줄 수 있는 마음은 준비되어 있었고, 어떤 말이든 상황이든 공감해주고 싶었다. 그녀가 수렁에 빠지거나 슬픔의 기억에 매몰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자신의 이기주의적 욕심을 내어 그녀의 결단과 방향을 지지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라는 신분을 만들어준 산시로 연못으로 돌아와 다시 시작했다. 좋은 기회인지 아닌지 알지 못하면서도 산시로 연못에서의 만남, 사랑, 이별, 그리고 재회라는 험난한 여정은 여전히 희망을 키워갈 수 있는 소중한 요소가 되었고, 자신의 마음을 더욱 마리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그녀를 아프게 했던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녀의 선조는 화족(華族) 출신이라고 했다. 현실적으로 법적인 근거, 특권과 이익은 없으나 부모님은 전통적인 가풍을 여전히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화족은 평민이 아니잖아?”
“신분상 특혜를 받았던 가문이지.”
“너의 집안은 귀족이었네?”
“태어나 보니 그렇게 됐어. 지금은 마음속에서만 있을 뿐이야. 사라진 전통이지 뭐”
그녀의 부친은 어려서부터 학습해 온 ‘귀족은 책임이 따른다.’라는 ‘노블레스(noblesse:貴族)와 오불리즈(obliger:義務を負わせる)’를 강조했다. 그런 신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던 그녀는 ‘그것이 부모님의 자존감’이라고 생각하여 존중했다.
그녀는 화족의 유래에 대해서 말했다. 무혈혁명으로 탄생한 메이지(明治) 정부는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의 정책에 의해 판적봉환(版籍奉還)과 함께 「태정관달 54호」(太政官達54号)에서 ‘공경 제후의 호칭을 폐지하고 화족으로 개정한다.’고 규정하여 종래의 공경 제후의 칭호를 폐지하고 신분을 화족으로 바꿨다.
이후 제도취조국의 국장(制度取調局の局長)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중심이 되어 「화족령」(華族令,1884년)을 제정했다. 화족령에서는 ‘작위 소유자를 화족으로 하고, 작위 소유자의 가족은 화족의 칭호를 향유하며, 작위는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으로 규정하여 특권을 부여했다.
화족령에 의해서 구 공가(公家)와 무가(武家)는 공작이나 후작의 작위를 받았다. 그 이외에 ‘국가에 대해서 공훈이 있는 사람을 새로운 화족으로 편입하고 공훈의 정도에 따라서 백작, 자작, 남작 등의 작위’를 주었다. 그렇게 해서 공가(公家) 137가(家)와 제후(諸侯) 270가, 그리고 메이지유신 후 공가가 된 5가와 제후가 된 15가 등 427가가 새롭게 화족에 포함되었다.
화족에게는 책임과 함께 특권이 부여됐다. 가독상속인(家督相続人)이 당주의 작위를 세습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화족과 그 자제의 혼인은 궁내 대신의 허가가 필요했다. 유작자는 궁내 대신의 인허를 받아 법령의 범위 안에서 자신의 집안에서 통용되는 규칙인 가범(家範)을 정할 수 있었다. 전통적 화족이나 공훈 화족은 지켜야 할 규칙을 준수하면 화족을 유지하며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그와 동시에 「귀족원령」(貴族院令,1889년)이 제정되면서 정치적 특권이 주워졌다. 즉 ‘귀족원은 황족, 공작 및 후작, 그리고 백작과 남작과 자작 중 선거로 선발된 자, 국가에 공훈이 있는 자 또는 학식이 있어 칙임 된 자, 각 부현(府縣)에서 토지 또는 공업상업에 다액의 국세 납부자 중에서 호선 되어 칙임 된 자’로 구성하도록 규정했다. 그 규정에 의거 30세 이상 공작과 후작은 전원, 그리고 백작, 자작, 남작 중 호선 된 유작자는 귀족원 의원이 되어 정치에 참여했다.
또한 「화족세습재산법」(華族世襲財産法)에 근거해서 경제적 특권을 누렸다. 즉 화족을 위한 은행으로 국립은행(十五銀行)을 창설하였고, 거기를 통해서 화족 재산의 특별 보호와 관리가 이루어졌다. 화족의 재산은 신분의 세습과 함께 세습되었다. 가범(家範)에는 배우자 및 입양 자격, 재산 처분의 절차를 정할 수 있었다.
특히 화족령이 일본 사회에 영향을 준 부분은 ‘국가에 대한 공훈이 있는 사람을 새로운 화족’으로 편입하여 작위를 주는 출세제도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메이지 시대 일본국가체제를 구축하고 근대화를 추진하여 제국을 만드는 데 공헌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였다.
그는 전통적인 무가나 공가의 출신이 아니지만 ‘국가에 공훈을 세워’ 화족이 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1884년 7월 7일 백작(伯爵), 1895년 8월 5일 후작(侯爵), 1907년 9월 21일 공작(公爵)이 되어 일본에서 가장 출세한 인물이 되었고 가문을 만들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공훈을 세워 시대의 영웅이 된 성공스토리는 평민도 화족이 될 수 있다는 신화를 만드는 데 중요한 본보기가 되어 출세의 욕망을 가진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별도로 하더라도 ‘특권이나 위대함(偉い)’을 좋아했던 그는 화족 제도에 의해 개인의 영광을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었다.
나는 “당시 화족령은 공훈을 세워 화족이 되게 하고, 귀족원령은 귀족원의 일원이 되게 하여, 자신의 출세와 가문의 영광을 누리는 기회를 제공하였기에, 국가를 위해서 충성하고 목숨을 걸 수 있는 충분한 동기와 자극제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그 영향력에 대해서 생각했다.
더욱이 “제국 시대에 특권을 가진 공작과 후작, 공훈을 세운 백작, 자작, 남작 등은 국가에 공헌한 정도를 인정받는 공적표이며, 그런 의미에서 화족과 국가 충성이 하나로 연결된 것은 아닐까?”라고 말했다. 메이지 이후 일본 정부가 추진한 ‘공훈을 강조한 화족령’은 일본근대화, 일본성장과 발전, 국가팽창을 촉진시키는 기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이 패전하면서 미군정은 법 앞에서의 평등, 귀족제도의 폐지, 영전에 대한 특권부인 등을 규정한 「일본국헌법」(日本国憲法, 1947년)을 제정하여 신분제도의 최상위에 있는 화족 제도를 폐지했다. 그것은 특권계급을 해체하는 것을 의미하고 동시에 국가팽창에 공훈을 세운 자들을 견제한 조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화족 제도를 해체하는 것은 화족이라는 신분을 없애는 것이었고, 그들의 누리고 있는 특권을 박탈하는 것이었고, 그들의 역할과 기능을 정지시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화족 제도와 신분제 사회를 상징하던 작위가 사라지면서 일본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화족들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화족 제도가 폐지되면서 화족 세계에는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재산세를 납부하는 상황이 되면서 전통적으로 계승해 온 재산을 국고로 환수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과세가격과 세액의 차이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대부분 승계해 온 부동산 재산은 국가에 반납하는 상황에 몰렸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소유한 재산을 매각하여 삶을 이어가기도 하였고, 고택을 교육기관에 기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부동산을 개발하여 임대사업을 하기도 했다. 대부분 화족은 신분을 잃고 평민으로 전락하여 상업을 하거나 무직자로 떨어지는 상황에 몰리기도 했다. 일부 화족은 ‘갖가지 마음은 버들가지에 맡겨라’(もろもろの心柳に任すべし)라고 하여 시대조류에 의지했다.
나는 ‘만약 일본이 추진한 근대화과정과 제국화 과정에서 특권을 부여하는 특권층을 만드는 화족령이나 귀족원령이 제정되지 않고 사민평등이 이루어졌었다면, 그리고 국가에 공훈을 세워 화족으로 만드는 일이 없었다면, 제국시대에 만들어진 불행한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거나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화족 제도가 제국 국가의 형성에 어떤 역할과 기능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지만, “국가를 위해서 공훈을 세운 대가로 작위를 받은 화족의 공과는 있을 것.”이라고 말을 했다. 그녀는 그 말에 대해서 침묵했다. 다만 그녀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포함한 이치조가(一條家)는 국가와 가문을 중시했지만 전쟁을 몹시 싫어했기에... ”라고 말을 맺었다.
이어서 그녀는 비밀스럽게 했던 자신의 조상의 내력에 대해서 설명했다. 선조는 남작(男爵)의 작위를 가졌다. 남작인 할아버지는 지질학자로 도쿄제국대학의 교수였고, 독일 무역상과 일본 여성이 결혼하여 낳은 혼혈여성인 할머니와 결혼했다. 그 사이에서 장자로 태어난 자신의 아버지는 남작의 작위를 승계하였고, 자작(子爵)의 딸과 결혼했다.
할아버지는 유럽에 파견되어 새로운 서양문물과 학문을 배워 전파했다. 특히 유럽과 미국, 남양제도, 중국과 조선반도 등에서 경제적 이권을 추구하는 서구열강의 힘이 발휘되는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하면서 일본이 추구해야 할 과제로 부국(富國)을 강조했다.
아버지는 학자의 길을 걸으려고 하였지만 할아버지는 앞으로 국가에 도움이 되고 일본이 부국이 되기 위해서 경제와 산업이 중요하다고 설파했다. 그렇게 해서 가문의 전통에 따라 아버지는 화족이 다니는 학습원 고등과(学習院)에 입학했고, 이후 도다이(東京大)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기업에 들어가 경험을 쌓고 상품을 생산하는 기업을 인수해서 아카몬(赤門) 주식회사를 세웠다. 그리고 사업의 다각화를 통해서 국내외무역을 하는 아카몬 무역회사, 기업합병을 통해 성장시키는 아카몬 투자사 등으로 구성된 아카몬(赤門) 홀딩스의 지주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화족, 학자, 경제가 등의 환경하에서 성장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계승되어 오는 화족의 예법과 가범을 익혔다. 그리고 가계의 전통과 전례에 따라 학습원 고등과에 들어가 수학한 후에 아버지가 다녔던 도다이(東京大)에 진학하였다.
성인이 되면서 그녀는 부모의 뜻에 따라 화족들의 친목 행사가 열리는 가스미가이칸(霞会館)에 방문하여 화족의 전통과 규범을 배웠다. 그녀는 선조들이 일본의 중심에 있었다는 자부심이나 애국심보다는 ‘불합리한 상황에서도 정도를 지켜온 자존감’을 중시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뜻을 존중했지만, 전통과 가업을 이를 남자 장손이 없는 것에 대해서 많은 아쉬움을 가졌다.
가족사를 이야기하는 이치조 마리를 보면서, 그녀가 전통과 현실, 화족과 정도, 가업과 자신의 꿈, 계승과 단절, 가범(家範)과 자유의지라는 틈에 끼여서 깊게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구축하고자 하는 자신의 미래와 아버지가 생각하는 가계의 미래에 대해서 그녀답게 현명하고 용감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무한 신뢰를 보내며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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