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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를 May 12. 2020

미소의 종말

나는 비행기가불편하다

언제부턴가 비행기를 타는 일이 스트레스가 되었다. 기내 공기의 건조함이나 팔다리 근육통 때문은 아니다. 운행중에 승무원에게 갑질을 하는 승객을 한 번씩은 꼭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폐쇄된 공간 속에서의 명백한 갑을 관계를 지켜보는 일 자체가 내게 감정 소모를 부른다. 최근엔 이것 때문에 가능하면 대한항공보다는 외항사를, 대형 항공보다는 LCC를 고르는 습관도 생겼다. 우리나라 주요 항공사 승무원들에게 요구되는 친절과 서비스 정신이 결과적으로 소위 ‘진상’ 손님을 키운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덜 친절하고 때로는 고압적이기까지 해 보이는 승무원들이 일하는 외국 국적기보다 우리네 항공에서 압도적으로 빈번하게 성희롱과 폭언을 목격했다. 거기다 운 좋게 비즈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라도 되었다 치면, 한정된 비행 시간 동안 자신이 받을 수 있는 더 나은 ‘대접’에 대해 본전을 뽑으려는 인간들을 가까이서 마주칠까 덜컥 겁부터 난다. 심장이 쿵쾅대는 나 같은 한 명의 승객에 비해 언제나 당사자인 승무원들은 능숙히 대처하지만 그녀들의 퇴근 후 거울 앞 표정이 종종 염려스럽다.


어릴 때부터 웃는 게 예쁘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눈웃음이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말 자체야 근사하고 값진 수사이겠으나 과거의 나는 이런 칭찬을 사회적 맥락 상 언제나 비뚠 의도로 받아들여왔다. 무표정하면 예쁜 얼굴이 아니니 웃어야 조금이라도 예뻐보인다, 혹은 그렇게 활짝 웃는 너는 분명히 온순한 사람이겠구나, 혹은 웃는 얼굴 덕택에 당신의 성적·인간적 호감도가 +1 상승하였습니다, 같은 의미로. 신입 사원 시절 아침마다 상사들 한 명 한 명의 눈을 보고 웃으며 인사하는 순간에는 그야말로 내 존재의 이유가 그것인 듯 착각도 했다. 불을 보듯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게 웃다 보니 결정적인 순간에 정색하는 일이 힘겨워졌다. 무례는 미소에게 만만한 싹을 보고 농담은 눈웃음 앞에서 쉽게 담을 넘는다. 요즘 유행하는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면서 대처하기’는 보통 내공자가 아니고서야 선보이기 쉽지 않은 신공이다. 그저 평소에 무표정을 많이 노출시켜 놔야 정말 웃고 싶지 않은 순간에 내 얼굴 근육도, 주변 공기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잘 안 웃는다.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 이른바 감정노동자보호법이 시행된 지 1년이 훌쩍 넘었다. 여전히 사각지대는 존재할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그나마 이 법이 보호하고자 하는 감정노동계 종사 직군에 속하지 않으니 이렇게 조용히, 그리고 아주 개인적으로 미소를 죽일 수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 770만 감정노동자들에게 웃음은 곧 임금이자 목숨줄이다. 벗을 수 없는 가면이다. 다른 서비스직에 비해서도 특히 시대착오적이고 과도한 친절을 요구 받으며 종종 성적 대상화되곤 하는 승무원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하여 다소 섣불리 감정적으로 선포하자면, 나는 미래의 AI 로봇은 가장 먼저 승무원 직군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기대하는 ‘인간적임‘이라는 관념 중에 ‘자연스럽고도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나 '고분고분함’ 등이 포함되어 있다면 하늘 위의 고객 안전을 책임지는 승무원이야말로 인간적일 필요가 없다. 미소의 종말을 기다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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