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아이'에서 어른이 되기까지
아주 오랫동안 사우나를 싫어했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이미 외모에 중닭 같은 느낌이 역력했던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 엄마 손에 이끌려 목욕탕엘 갔다. 그 시절에는 여아고 남아고 전부 아버지가 아닌 엄마가 무조건 여탕에 데려가 씻기던 때였기 때문에, 내가 사람들의 기대치보다 너무 커버렸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그 자체로는 유별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사우나실에 들어가기 전 엄마는 내 피부를 연녹색 이태리 타월로 늘 세게 문질렀다. 경미한 아토피 체질이었던 내 팔꿈치와 목덜미 같은 곳들은 조금만 건드려도 쉬이 빨갛게 달아오르곤 했는데, 엄마의 때밀이 강도는 매번 피를 보게 하는 수준이었다. 나는 아파서 눈물을 질금질금 흘리며 사우나에 따라 들어갔다. 그럴 때마다 사우나 안의 여인들은 아이구 세상에 피부 질환이 있는 아이를 이렇게 뜨거운 곳에 데리고 들어오다니, 하며 엄마를 책망했다. 그러면 엄마는 특유의 그 푹 꺼진 눈을 깜박거리며 도무지 원인도 해결책도 찾을 수 없는 질환인데 내 새끼 좀 살려달라며 도움을 청하곤 했다. 여인들은 걱정 어린 눈길로 내 몸을 이리 저리 대강 살폈고 일단 병원에 재빨리 데려가라는 해답을 제시했다. 엄마는 그러면 나를 그 길로 목욕탕에서 안고 나와, 요구르트에 빨대를 꽂아서 내 입에 물리고는 정성스레 내 온 몸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병원에 데려가는 일은 없었다.
동네의 아낙네들이 우리를 손가락질하기 시작할 무렵, 엄마는 버스로 서너 정거장 떨어진 동네의 다른 목욕탕을 들락거리기로 했다. 그 곳에서 나는 엄마가 집에서부터 손수 타온 미숫가루를 한 잔 마시고 사우나에 들어갔다. 앉은 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끔찍한 복통이 시작됐다. 내가 끙끙대기 시작하면 엄마는 사우나 안의 여인들에게 우리 애가 뭘 먹고 아픈지 모르겠다며 울음 뒤섞인 비명을 한 차례 내뱉은 후, 내 손을 잡고 나갔다. 게워내고 싸지르는 몇 바퀴의 고역이 지나가면 엄마는 오랜 시간 약손을 해주고 죽을 쒀주었다. 미숫가루 안에 성냥개비를 갈아 넣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아주 한참 뒤의 일이었다.
사우나에서의 내 고통이 엄마의 친절을 불러오고 오래도록 그녀의 마음에 안정감을 불어넣어준 다는 사실까지, 그 시절의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나보다 훨씬 커다란 엄마를 왜인지 가엾게 느끼던 나는 이 목욕탕 놀이를 꽤 오랫동안 잔말 않고 따라주었다. 사회적 통념 상 도무지 더는 여탕을 들어갈 수 없는 나이가 되자 엄마는 나를 해방시켜 주었는데, 그 때 이미 동네에서 나는 모두에게 ‘아픈 아이’로 기억되고 있었다.
뮌하우젠 증후군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건 대학생이 된 뒤, 학교에서도 교과서로부터도 아닌 실제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이의 책 속에서였다. 타인의 관심과 동정을 유발하기 위해 아프다는 거짓말이나 자해를 하는 정신과적 질환. 20여개국에서 출간되어 이미 베스트셀러가 된 <병든 아이>의 저자 줄리 그레고리는, 이 질환을 자식을 통해 표출하는 엄마로부터 수년에 걸쳐 학대 받아왔다. 이 깊은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고 세상에 알린 그녀도 한 때 나처럼 성냥의 빨간 부분을 간식처럼 먹었다고 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이야기로 알지 못했다면, 나는 영원히 엄마의 아픈 아이였을 것이다. 그 누구도 내 고통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 누구도 몰랐기 때문이다.
아버지로부터 지속적인 성적 학대를 받아왔지만 남의 집 안 일이라며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자 밖에 나가 자식의 고통을 대신 남들에게 들이밀어온 사람. 이것이 정신과의가 된 내가 깨닫는 목욕탕 놀이의 전말이다. 아버지가 엄마의 몸에 낸 교묘한 상처들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엄마가 만든 내 몸의 상처는 사우나 속의 어두운 조명 속에서도 남의 눈에 잘 띄었다. 그러나 끝내 절망적인 것은 그 두 상처가 갖는 공통점이었다. 나를 해롭게 하는 이를 의지할 수밖에 없고 동시에 긍휼히 여기게 되는 패턴, 이것이 가정 폭력과 아동 학대의 가장 무서운 굴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