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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수분 Apr 21. 2024

너였어?

산책로에 그림 그리던 느림보 화가

궁금했었어.

며칠 전부터 내가 걷는 길가에

잔디풀 가까이, 빛나는 흰색 그림.

비뚤어진 동그라미, 하트모양, 굵은 선, 가는 선, 나선형......


지렁이도 아니고

노래기도 아니고

그림은 자꾸 늘어 가는데

화가는 안보이더니.


오늘 만났네.

너, 작은 달팽이.


네가 지나간 황토색 시멘트길바닥에

맑은 날에만 보이는 반짝이 그림.


그렇게 말랑하고 조그만 속살로 그림을 그렸니?

그렇게 느리게 느리게?

친구들과 함께 이렇게 많이 그렸어?


네가 내게 밟히지 않고 몰래몰래 그림 그릴 때

나는 어디 어디 갔었는지 알아?


모악산에 진달래, 산철쭉 보러

언니네 텃밭에 나물 뜯으러

서학동 선생님댁에 목단꽃 보러

완산칠봉 꽃동산에 철쭉, 겹벚꽃 보러

많이 다녔다.


내가 보고 싶어서 달려가는 곳이 내 세상이지.

너도 부드러운 속살로 남긴 빛그림이 너의 온 세상이었겠다.


온갖 생명이 새로이 오는 봄,

새로이 떠나는 생명도 있었지.


때로는 너무 이르게.

때로는 뒤돌아 보며.

때로는 자연스럽게.



멈추고는 이제 움직이지 않는구나.

비로소 너를 내게 보여준 거야.


봄을 따라 왔다가, 봄을 따라 떠난 작은 달팽이를 기억할게.

새로이 떠난 작은 달팽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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