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9. 22 산악회 따라 하루 나들이
추석이 지나고 며칠 후 거짓말같이 더위가 물러갔다.
늦더위에 숨 죽은 배추같이 맥을 못 추다가 한 이틀 비가 온 뒤로는 좀 살 것 같다.
이젠 잠자리가 선듯거려서 잠결에도 자꾸 이불을 당기게 된다.
지난 일요일 완도 보길도에 다녀왔다.
전에 자주 동행했던 산악회에서 보길도 섬산행을 간다기에 나도 신청했다.
7시에 산악회버스에 올라 3시간쯤 걸려서 전남 완도 화흥포항에 도착했다.
보길도는 배로는 직접 들어갈 수가 없고, 이웃섬 노화도 동천항에 내려서 자동차로 입도하게 된다.
산악회 버스가 함께 배를 타고 와서 우리 팀은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산행팀은 낙서재 입구에서 내리고, 유람팀은 윤선도 원림을 둘러보러 내려갔다.
고산 윤선도(1587~1671, 향년 84세)의 섬, 보길도.
해남윤씨 명문가에서 태어난 윤선도는 10대부터 학문에 뛰어났고, 20대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이름을 알렸다.
30세, 광해군 때 간신배와 외척들의 권력농단에 비분강개하여 '병진소'를 올렸다가 권력의 탄압을 받게 된다.
함경도, 경상도등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인조반정으로 해배된 후에도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서 생활했다.
조정의 부름으로 인조 6년 42세에 왕가의 사부가 되어 왕자들을 가르치는 임무를 맡았다.
사부직을 마친 후에야 문과 장원급제를 하고 경상도에서 목민관을 지냈다.
50세, 윤선도가 낙향생활하던 중에 병자호란이 났다.
인조는 두왕자를 강화도로 피신시키고 자신도 강화도로 가려했다가, 청군에 길이 막혀 소현세자를 데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윤선도 역시 가솔을 이끌고 강화도로 가던 중에 강화도가 청에 함락되었고, 곧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에 육지고향을 마다하고 청군이 닿지 못할 제주도로 향했다.
윤선도의 배는 바람 따라 해남에서 가까운 보길도에 닿았고 잠시 머물던 윤선도는 보길도의 자연에 매료되어 거기에 정착하기로 했다.
보길도의 분지마을에 이름을 '부용동'이라 짓고 세연정, 낙서재, 곡수당, 동천석실등을 지어 마음껏 유유자적하는 노후를 보내고 장수했다.
윤선도의 본가인 해남 녹우당에는 본처와 자녀들이 있고, 보길도의 부용동은 첩과 자식들이 살아가는 별장지였다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보길도의 윤씨들은 셋째 부인의 후손들이라고 전해진다.
긴 유배생활을 하고도 자신만의 낙원을 조성하고, 수백 명의 식솔을 거느린 재력은 해남윤씨 가문의 막대한 유산 덕분이었겠지.
윤선도가 보길도의 사계절을 읊은 연시조, 안빈낙도의 노래 <어부사시사>가 생각난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그 후렴구가 귀에 쟁쟁 들려오는 듯.
이번 보길도여행은 내게 만족이 없는 여행이었다.
유람팀을 선택했어야 했는데......
산행의 욕심을 버렸어야 했는데......
곡수당을 지나 오르는 산속은, 초입부터 어둡고 습해서 좁고 검은 길만 보며 걸어야 했다.
보슬비가 그치지 않아 미끄럽고, 시야는 열리지 않았다.
곡수당~격자봉(433미터)코스, 5.6km 왕복산행을 계획했으나 정상에는 오르지 못하고 하산해야 했다.
4시 20분 떠나는 배를 타려면 시간이 촉박해서 두 시간만 산행을 했다.
'부용동 원림'은 버스에 앉은 채 지나가면서 눈을 흘기며 길게 바라보았다.
돌아오는 길, 바닷가 정자아래서 광어회에 소주 한잔을 먹게 돼 그나마 반분이 풀렸다.
보길도에는 다시 와야 한다.
산악회를 따라오지 말고 마음 맞는 친구하고 '시간'을 여유롭게 가지고 올 것.
보길도에서 먹고 자고 윤선도처럼 한량놀음 하면서 즐기러 다시 올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