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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에 날개를 달자 Oct 14. 2020

슈필 라움은 부부 모두에게 필요하다

남편의 나이가 50이 넘기 전 나는 장난처럼, 진담처럼, 그리고 농담처럼 이야기한 것이 있다. 지금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50이 넘어 공인중개사를 따면 좋겠다고. 꼭 반듯한 사무실이 아니어도 좋으니 아침 일찍 나가 저녁밥 먹기 전에 들어올 수 있는 당신과 당신 친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바둑도 두고 장기도 두고, 때론 막걸리 한 잔 걸칠 수 있는 그런 사무실을 하나 마련하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남자나 여자나 나이 먹을수록 자신만의 공간은 꼭 필요한 거라고 그렇게 말하곤 했었다. 나의 이런 농담 같은 진담이 통했던 것일까? 남편은 50이 넘은, 50 중반이 되어가는 나이에 중인중개사를 따고(?) 말았다. ^^ 그걸로 밥 벌어먹을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사는 이 건물 1층에 남편 이름으로 사무실을 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소소한 행복일 수밖에 없다. 


김정운 작가의 책이 나왔다는 걸 알았다. 이 작가의 글이 나를 웃게 만드는 일이 많아 읽게 되었는데, 이 책에서 흥미로운 단어를 발견했다. 바로 ‘슈필 라움’이다. 놀이와 공간이 합쳐진 슈필 라움이라는 말은 우리말로 여유 공간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고 한다. 즉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공간, 물리적 공간과 심리적 여유까지 포함하는 공간이라는 말이다. 작가는 우리나라에 이런 단어가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이런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자들에게는 화장대라는 작은 물리적, 심리적 공간이 존재하지만 남자들에게는 이런 공간이 없기 때문에 어두운 공간이나 이상한(?) 공간에 가서 이상한 짓(?)을 일삼게 된다나 뭐라나.. ^^


작가는 자신의 공간 슈필 라움은 만들었다. 그곳이 바로 미역 창고. 이 책을 읽으며 나도 남편에게 이런 공간 하나 선물(?)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주말 부부가 되어 버린 지금. 남편은 원하지 않았던 슈필 라움이란 공간에서 일주일의 4~5일을 생활하고 금, 토, 일은 서울에서 생활한다. 자신의 공간이 있어서 일까? 남편은 붙어 있을 때보다 아이들이나 나에게 잘하고 자상해졌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다시 서울로 발령이 나면 남편에게도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 줘야 하는 건 아닌지, 그 공간이 중개사무실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건 나만의 일방적인 것인지... ^^ 책을 읽으며 김정운 작가가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에게만 그런 공간이 필요한 게 아니라 여자에게도 그런 공간이 필요함을 나는 아니까. 


이 책에서 흥미롭게 읽었건 것은 ‘나는 자연인이다.’에 대한 이야기다. 우중충한 개량한복을 입고, 꽁지머리를 한, 보고만 있어도 쉰내가 날 것 같은 남자들. 모든 주인공이 약초를 캐고 근거 불분명한 약초의 효능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산에서 내려와 텃밭에서 상추나 파를 따서 저녁을 하는 그들. 이 프로그램을 작가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작가 또래의 남자들이 많이 봐 한국인이 좋아하는 프로그램 탑 10에도 든다는. 왜 이 프로가 인기가 있는지에 대한 작가의 분석. 그 이유는 바로 자유다. 마음껏 불을 피울 수 있는 자유와 시선의 자유. 평생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야 했던 그들이 관찰당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대로 볼 수 있는 자유가 생긴 것. 그것이 바로 행복의 핵심이라는 거다. 산 위에 올라가 마음껏 바라볼 수 있는 조망과 피신의 본능이 중년 남자를 그 프로그램을 보게 하는 이유가 되고 자연인으로 살고 싶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는 것.


나도 가끔 남편이랑 그 프로를 보게 되는데 예전에는 남편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그러면서 같이 내려가서 살자고 했지만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남편은 자연인처럼 살지 못할 것이고, 어쩜 나만 자연인처럼 살게 될지 모르니까. ^^ 김정운 작가의 책을 읽다 보면 내 남편의 심리 상태를, 내 아이들의 심리 상태를 조금은 알 것 같고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내가 조금 더 능력이 된다면 남편에게도 미역 창고 같은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다만.. 남편은 혼자서는 결코 내려가지 않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긴 하지만. ^^ 남편은 자연인이 아닌 내 곁에서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늦게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는 그런 시간을 즐기는 사람이기에 혼자 떨어져 외딴섬으로 갈 일은 없을 것 같다. 


나이를 먹으면서 남편과는 친구 같고, 동지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사람을 사랑했던 시간이 분명 있었을 것이고 마음 한 켠에는 아직도 사랑이라 우기는 감정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부부이기에 소홀했던 감정들, 혹은 공간들을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고 싶고, 뭔 일이 있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고 싶다. 남편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뭔가를 할 수 있는 작업실이 생기는 그날이 오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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