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미하엘 엔데)를 읽고
나는 시간에 강박이 있는 사람이다. 시간 약속은 칼 같이 지켜야 하고, 내 시간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시간도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허투루 시간을 쓰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다. 오늘의 내가 미래의 내가 되고 과거의 내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가능하면 타이트하게 시간을 관리하려고 한다. 그게 당연한 거라 생각하고 산 사람이지만 가끔 생각한다. 그렇게 살아온 난 과연 행복한 것인가? 하는.
입버릇처럼 우리는 바쁘다고 말한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바쁘게 살고 있는지 모른 채 바쁘기만 하다. 하루에 한 번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도 없고, 지나가는 풍경에서 계절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한 채 어느 날 꽃이 피고 꽃이 짐을 알게 된다. 그러고는 벌써 계절이 이렇게 변했네.라는 말로 다시 시간을 쪼개며 산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에게서 시간을 빼앗아가는 회색 집단 신사들. 이들은 시간을 저축해야 한다고 사람들을 꼬드긴다. 그 꼬임에 넘어간 사람들은 시간을 저축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그러면서 삶은 피폐해진다. 전에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모모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던 사람들은 어느 순간 모모를 찾지 않고 바쁘게 살아가게 된다. 모모는 회색 신사 집단으로부터 시간에 쫓기는 이들을 위해 도전하게 되는데....
시간을 아끼는 사이에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것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아무도 자신의 삶이 점점 빈곤해지고, 획일화되고, 차가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점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 그것은 아이들 몫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아이들을 위해서도 시간을 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삶이며, 삶은 가슴속에 깃들여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시간을 아끼면 아낄수록 가진 것이 점점 줄어들었다. (97~98)
어른들이 만든 장난감은 아이들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고 또 다른 것을 원하게 만든다. 마론 인형이 있다면 그걸로 즐거운 건 30분도 되지 않는다. 그 인형을 위해 다양한 옷을 구매하고 액세서리를 구매하지만, 구매하고 나면 또 공허해지는 게 장난감이다. 장난감으로 아이들과 놀아줄 시간을 어른들은 벌었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 요즈음은 이것보다 심각한 핸드폰이 나타났다. 핸드폰만 아이들에게 주면 아이들은 어른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 이것만 던져주면 어른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좋은 행동인지는 생각해야 한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번 어른들은 다른 일을 할 수 있지만, 아이들과의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엔 애들이 빨리 자라기를 바랐다. 나는 솔직히 아이들을 키우는 게 힘들었다. 살면서 이렇게 힘든 일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다. 몰라서, 처음이라서, 공부하며 치열하고 정신없이 키웠다. 나도 엄마가 처음인지라 실수도 많았고, 아이들에게 상처도 줬을 것이다. 하지만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랐다. 부모의 도움 없이 혼자서 자란 줄 알지만, 그래서 나는 자유를 찾았지만 나는 과연 아이들에게 좋은 부모였을까? 아이들과 좋은 추억을 만들었을까? 아쉬운 부분은 없었을까? 아이들을 키운다는 건 내 시간을, 내 인생 일부를 내줘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냥 자라지 않으니까. 나는 나에게 주어진 많은 시간을 아이들에게 줬다. 그리고 아이들 역시 아이들의 시간을 내게 줬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았다.
시간은 우리의 삶이다. 시간 속에 켜켜이 우리의 모든 것들이 녹아 공감하고 사랑하고 배려하게 되는 거지만 요즈음 사람들은 그런 모든 것들이 결여되어 있는 듯하다. 아이들의 동화지만 내 인생을 생각하게 된다. 시간을 어떻게 쓰는 것이 좋은지 이젠 중간 점검을 해야 할 때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바쁘게만 지내는 게 능사는 아니다. 매 시간 속에 작은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으로 나이 먹어야 할 텐데. 시간의 흐름이 야속하면서 고맙기도 한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