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꽃을 삼킨 아이 (박향)을 읽고
70년대 태어난 내게 70, 80년대를 회상하라고 하면 안정보다는 혼란을 떠올리게 된다. 어느 집에나 형제자매들이 북적거렸고, 누런 콧물이 코앞에 당연하듯 매달려(?) 있었다. 시커먼 얼굴에 때 국물이 줄줄 흐르는, 이 집이나 저 집이나 아이들의 상태는 비슷했고, 특별히 비교할 것도 없었다. 쌈지 돈을 아끼며 아들을 위한 교육에 힘을 썼으며, 딸들은 그 아들을 교육시키는 발판에 지나지 않았다. 9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들이 하나 둘 등장하면서 추억을 연상시키고 있었는데 그 시대보다 앞선 시대를 이야기하니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난 것 같아 살며시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결코 편안하지 않았고, 혼란했던 시절. 부모들의 마음 역시도 그 혼란과 무관하지 않았음을 어른이 되어보니 알게 되었다.
12살. 5학년의 수희는 1남 3녀의 막내딸이다. 맏딸 강희는 뛰어난 미모를 가졌고 공부도 잘했지만 대학을 가지 못하고 가구점에서 경리로 일하고 있다. 둘째 경수 오빠는 엄마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하나뿐인 아들이다. 강희 언니가 공부를 잘했음에도 대학에 가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경수 오빠 때문이다. 빠듯한 살림에 딸인 언니를 대학에 보낼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둘째 언니 정희는 자기만 아는 새침데기이고, 오빠는 언제나 세상을 조금은 삐딱하게 보는 사춘기를 맞이한 질풍노도이기도 하다. 수희는 집안에서 심부름을 아주 잘하는 아이이자, 학교에서도 심부름꾼이다. 선생님의 자잘한 심부름부터 부모님의 심부름까지 수희에서 심부름의 영역은 넓다. 그런 어느 날 강희 언니의 편지 심부름을 하게 된 수희는 어른들이 말하는 사랑에 눈을 뜨고 그 배신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놓아버린 강희 언니를 발견한다. 그런 강희를 마주 볼 수 없었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수희의 집은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다. 수희의 어린 시절을 함께 한 육영수 여사의 죽음,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그리고 5. 18 항쟁까지... 시대적인 참혹한 상황이 수희네 가족의 아픔과 함께 한다.
5학년인 수희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 세상은 아름답지도, 그렇다고 어린아이다운 천진난만함도 없다. 어른 세계의 축소판인 아이들의 세상도 힘의 논리가 지배된다. 또한 수희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어른의 사랑은 따스하지 않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언니를 유린한 남자를 용서할 수 없다. 잘못 시작된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만나서도 결코 행복하지 않다. 위대한(?) 대통령이 죽어 이 나라가 어떻게 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고, 그 대통령을 욕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어제의 대단한 사람이 오늘 욕먹는 형국. 어린 수희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나라는 혼란스러워졌다. 국민의 아픔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모습은 이 나라가 처한 현실이자 수희네 가족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힘들어진 수희네는 모든 것을 팔아 식당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언니를 사랑하는 남자가 생겨 그와 결혼하게 되지만 그 결혼은 강희를 더 힘들게 한다. 또한 하나밖에 없는 아들 경수는 대학 진학과 동시에 집과 멀어진다. 경수만 바라보는 엄마를 무시한 채 광주로 향하고, 죽음이 되어 돌아온다. 철저히 부서진 언니와 가족들을 보면서 수희는 어떤 결심을 했을까?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된 수희 앞에 나타난 사람은 바로 강희 언니를 유린한 영어 선생 배도연. 그를 향한 복수의 마음이 수희를 강하게 만든다.
자칫 우울할 수 있는 시대적 상황을 한 가족의 인생사와 함께 재미있게 혹은 눈물 나게 잘 그려냈다. ‘에메랄드 궁’이라는 책을 통해 이 작가를 알게 되었는데, 이 책 역시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어렴풋이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책도 연상되지만 이 책은 이 책만의 색깔이 있고 그림이 있다. 12살 아이가 20살이 되기까지. 어느 시대건 쉽게 어른이 되지는 않는 것 같다. 이 책을 보면서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던 날. 흑백텔레비전을 통해 온 국민이 울던 모습, 그리고 곧 전쟁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불안함. 새로운 정권이 들어오면서 거리 곳곳에서 터진 체류탄. 입 잘못 놀리면 잡아간다는 어른들의 이야기, 그리고 늦은 밤 모두 불을 끄라고 소리 질렀던 등화관제 등.. 어렴풋하지만 기억나는 나의 어린 시절과 당시의 불안했던 시대 상황. 그 배경 속에서 나 역시 사춘기를 지났고, 어른이 되었다.
나는 시대에 순응(?)하는 기성세대가 되었다. 우리들의 아이는 이 세상에 어떻게 대항하고 어떻게 더 좋은 나라를 만들어갈까? 또한 지금의 우리 아이들은 훗날 어린 시절을 어떻게 회상하게 될까? 더 좋은 나라가 될 수는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