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문(反問)의 묘미(妙味)

by 민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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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질문에 당황한 경험을 떠올려보자. 부하나 후배의 ‘당돌한’ 질문이었을 수도 있고, 거래처와의 협상과정에서 날아온 허를 찌르는 ‘일침’이었을 수도 있었으며, 난생처음 부모가 되어 갑자기 물어온 딸아이의 그것일 수도 있었으리라. “아빠는 꿈이 뭐야?” 뜬금없던 질문에 나이 사십이 넘은 나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하얀 백지가 된다. 황당한 질문을 접했을 때, 당신이라는 상대는 무슨 대답을 어떻게 해왔었는가? 돌이키고 싶지 않은 기억이겠으나 무식하면 용감할 수 있다는 정면돌파의 정공법(正攻法)이 있다면 한 번쯤 배워 익히고 싶지 않을까?




‘적절한 대답이 무엇일까?’, ‘나에게 바라는 대답이 있었던가?’ 질문의 표면적 해석부터 상대와의 관계적 해석까지 질문의 본질은 외면당한 채 머릿속은 온통 군더더기 대답으로만 꽉 차있다. 머릿속 밑바닥의 경험까지 쥐어짜 내 보려 애써보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얼굴은 달아오르고 나도 모를 희한한 대답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곤 한다. 말이라는 것이 한번 내뱉으면 주워 담기 힘든 것일진대 대답의 적절성은 무시한 채 즉답(卽答)의 쾌락이라도 찾으려는 듯 쏜살같이 대답하곤 아찔해한다. 아마 그 이전 누군가의 질문에 적절한 답을 했었다는 칭찬이 만든 비극일 수도 있고, 구렁이 담 넘듯 질문의 요지를 살짝 비켜가는 노하우를 자랑할 셈인 듯도 싶다. 누가 들어도, 되지 않을 말을 대답이랍시고 떠들어대던 모습에 후회도 적잖이 들지만 당황스러움의 결말이라는 것이 당연지사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자기 위안을 삼으며 합리화하기도 한다.




황당한 질문을 접했을 땐, 내가 전부를 안다고 생각하지 말자. 어떤 대답이든 해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자.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을 땐 그저 무답(無答)이 정답일 수 있음을 믿어보자. 사람은 자고로 자신의 허물은 몰라도 남의 잘못은 쉽게 눈치채는 법. 눈 가리고 아옹하지 말고 충분히 인정하자. 자신의 경험이 미천하고, 지식이 짧은 것을 인정하며 겸손의 자세를 갖추게 되면 그 어떤 황당한 질문에도 단 한마디의 대답이 당신을 구원해 줄 수 있다. 질문자와의 관계가 더 돈독해질 수 있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하는 그것이 바로 반문(反問)의 기술이다.




이제 상대의 질문에 반문을 해보자. ‘무엇을 어떻게 반문하지?’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상대의 질문에 대답을 생략한 채 “and you?”를 외쳐보자. 나에게 생각을 물어온 사람에게 되려 반문(反問)하는 것이 예의 없게 비칠 수도 있겠으나 그 부분이 오해되지 않도록 머릿속에 약간의 쉼표를 두는 것이 중요하다. 약간은 생각하는 듯 시간의 여운을 두고 “…… 당신 생각은 어떤데요?(and you?)” 그 즉시 대답자의 마음은 평온해진다.




“선배님, OOO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세요?” “음… 자네는 OOO에 대해서 어떻게 내가 처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 “도대체 원가가 얼마나 되길래 공급가가 그리 비쌉니까?” 아… 저희가 원가가 얼마쯤 된다고 생각하시는데요?” / “아빠는 꿈이 뭐야?” “음… 우리 딸은 꿈이 뭘까?”




그저 주어(主語)만 달라지고 물음표까지 그대로 베꼈을 뿐인데, 잠시 잠깐 당신에게 건너왔던 대답의 강박관념은 다시 원 질문자의 것으로 돌아간다. 더 신기한 것은 내 속내가 무엇인지는 아랑곳 않고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생각에 잠긴다는 점이다. 그것도 내 반문을 사뭇 고마워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반문(反問)의 묘미(妙味)>다. 질문과 답은 서로 주거나 받거니 해야 의미가 있다지만, 반문도 하나의 독특한 형태의 대화 방법이며, 그 기술 또한 현명한 ‘답(答)’일 수 있음을 간과하지 말자.




자, 아직도 당황스러운 질문을 받을까 걱정되는가? 대답만이 존재하는 면접시험만 아니라면 그 어떤 질문이 닥쳐도 솟아날 구멍 하나쯤은 마련된 셈 아닌가? 눈 앞이 하얘질 때, 예의 있는 물음표로 되돌려주자. 시간의 여유는 당신의 것이 되고, 더 나은 대답이 떠오를 것이다. 어릴 때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봤음직한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의 질문도 다섯 살 때의 나로 돌아간다면 아마도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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