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돌

제주 두 달 살이 4

by 운고

첫걸음에 돌이 들어왔다. 검정 원색을 그대로 뿌려 놓은 듯 칠흑 같은 검정이다. 수채화로 담아낼 수 있을까.

저지 정보화 마을에서 금능, 협재해수욕장을 거쳐 한림항에서 마무리되는 19.9km의 다소 긴 여정 14길이다. 조용한 숲에서 파랑의 바다로 넘아가는 다채로운 길, 돌담길, 밭길, 마른 하천 길, 자잘한 돌로 덮인 바닷길, 모래사장 길 등 발 끝에 전해지는 질량감이 제각각이라 재미있다. 특히나 자잘한 돌이 깔린 해변길은 밟은 돌이 휘청이면 몸까지 휘청거린다. 바다는 유혹하지, 길은 까다롭지,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빠져든다. 걷는 맛이 옹골지다.

바다 빛깔이 근사하다. 검푸른 파랑과 가벼운 물색이 띠를 이루듯 큰 경계를 만든다. 검푸른 바다색에 빠져들다 보면 내 안의 이야기가 술렁술렁 녹아내린다. 대책 없이 나를 쏟아내게 하는 저 바다색은 어디서 온 걸까, 삼다도 제주의 애환과 설움에 얼마나 애간장을 녹였으면 돌도 바다도 저리 검을까.

새까만 돌이 길을 연다. 얼기설기 쌓아 올린 크고 작은 돌들이 등허리를 맞대고 서서 올레꾼을 맞는다. 육지의 담은 대체로 영역을 가르는 용도인데 제주의 돌담은 생명을 보호하는 방풍이 주임무이다. 집을 두르는 돌담 안에 텃밭을 경계로 또 담이 있다. 며칠 전 체험한 강풍 덕에 생명들이 견뎌내야 할 바람의 크기를 알고 보니 돌들이 얼마나 큰 일을 하고 있는지 알겠다. 고육지책으로, 지천에 널린 돌들을 쌓아 작물과의 공존을 모색한 것이 지금의 풍성하고 정갈한 돌담길이 되었다고 한다. 돌담길을 걷다 보면 현무암 자잘한 구멍 사이로 바람 소리가 새어 나온다. 바람이 지나갈 길을 터주는 섬세한 손길, 마을 안으로 이어지는 돌담은 촘촘하고 야무진데 바닷가 쪽은 쌓음이 성글다. 해변은 바람과의 정면 승부보다는 적당히 받아들이고 적당히 돌려보내는 유화책을 쓴 것이리라. 돌 틈 새로 들어온 바람은 작물을 키우고 사람을 살리는 맑은 기운이 되었다.

바람이 자유롭게 오가는 돌담길 길목에서 진아영할머니 쉼터를 마주했다. 어제 찾아간 4.3 기념관에서의 배움을 현장에서 마주하니 반갑고 뭉클했다. 4.3 당시 군인의 총격으로 턱을 잃어 평생 무명천을 두르고 있어서 무명천 할머니라 불리는, 진아영 할머니의 손바닥만 한 가옥도 돌담에 둘러싸여 있었다. '해안으로부터 5km 밖은 출입하지 말라.'는 소개령을 선포하고, 군경은 해안선 5km 밖의 마을을 모두 불 지르고 굴 속에 숨어있던 사람들을 죽이는 엄청난 재앙을 저질렀다. 수많은 진아영이 죽거나 다쳤다. 더 가슴 아픈 건 가피해자가 우애를 나누던 벗이요 이웃이었던 경우가 많아 지금껏 가슴의 응어리를 보듬고 산다고 한다. 화해도 용서도 쉽지 않으리. 그러나 다행히 제주는 무거운 역사에 악수를 청하는 노력들을 시작했다. 군인, 경찰과 유가족이 화해의 손을 잡았다. 용서와 화해를 떠나 그 물꼬를 열어가고 있음이 감사했다.

그날을 아는지 모르는지 돌담 사이 선인장은 도란도란, 제주스럽게 따사롭다.

돌담을 따라 새살새살 걷는 길, 올레 14길은 돌담을 따라 아린 역사를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