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바람

제주 두달살이 3

by 운고


이렇게나 거칠게 몰아친다고?


저지 정보화 마을에서 용수 포구를 향해 올레 13길을 역방향으로 걸었다. 저지 오름까지의 짧은 경사만 감당하면 나머지는 잔잔한 내리막 걷기라는 '올레'의 정보를 참고하여 길을 잡았다. 역시나 초입의 경사를 넘어서니 햇살 따사로운 들판과 파란 하늘이 느긋하게 이어졌다. 제주다운 좁다란 현무암 돌담길이 정겨워 껑충껑충 뛰어보기도 하고 너울너울 춤도 추면서 오랜만의 재회를 즐겼다.


그런데 웬걸, 복병은 경사가 아니었다. 올레 14길은 내륙 길이어서 종점인 용수 포구에 이르러서야 바다를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어느 순간 코끝으로 진한 바다 내음이 밀려왔다. 종점에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려가던 순간 거칠게 몰아치는 역풍, 몸이 뒷걸음질을 쳤다. 야리야리한 나의 동행은 날아갈 수도 있는 바람이었다. 하늘은 여전히 화창하고 햇살은 눈부신데 바람은 잔뜩 성이 났다. 바람과 햇살은 원래 비례 곡선 아니었나. 마지막 1시간 정도, 전쟁을 치르듯 걸어 올레 수첩에 완주 도장을 선명하게 새겼다.


어젠 더 험한 날이었다. '서귀포 치유의 숲'의 숲 체험 프로그램을 신청하여 방문했는데 야외 프로그램이었다. 우중충한 구름에 칼바람까지 더해져서 얼음 같은 한기가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견딜 수 있을까, 돈값에 연연하는 가난한 여행자인지라 울며 겨자 먹기로 인솔자를 따라 숲 깊숙이 빨려 들어갔는데 빛이 스며들지 않는 울창한 숲엔 바람 소리만이 날카로운 현악 앙상블을 들려주었다. 쉬이 잉 쉬이~~~


숲 체험 강사샘은 이런 날씨가 일상인 걸까, 일말의 동요도 없다. 10분 정도 걷고 20여 분의 체험 과정을 차분하게 이끌어 간다. 숲 속에서 하는 성인들의 체험이니 얼마나 정적인 활동이겠는가, 5,2,5 호흡법 익히기, 누워서 5,2,5 호흡하기, 막대 들고 호흡하기, 이 중 최상의 난코스는 해먹체험이었다. 해먹에서 5,2,5 호흡하며 잠들기! 속으로 생각했다. 코스니까 잠깐 누워보라는 거겠지! 착각이었다. 20분을, 허리에 냉기가 차오르고 발가락의 피가 얼어가는 걸 생생하게 체험했다. 체감으로는 동태가 되어 혼자 못 일어날 줄 알았는데 살아있는 육신은 둥글둥글 몸을 말아 일어났다. 그게 또 좀 오묘하다. 냉동된 몸은 벌벌 떨고 있는데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혈액은 부산스러워진 듯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력 질주하는 게 느껴졌다. 이어지는 족욕은 고속으로 찍은 도시 야경 사진처럼 빛의 속도로 피의 순환을 이끌었다. 발끝이 데워지며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온기는 내 안의 긴장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추위에 독해졌던 맘 자락까지 어루만졌다. 얼굴에 꽃이 피었다.


가벼워진 몸으로 사려니 숲길을 찾았다. 숲 체험으로 심신이 힐링되어서인지 숲의 등고선을 타고 넘는 것도 너끈했다. 너무 신나게 걸어 목표치인 2만 보를 훌쩍 넘어버렸다. 그럼에도 내일의 걸음이 걱정되지 않는다. 나는 매사에 강약의 조절을 우선하곤 한다. 그 속에서 삶의 유연성이 빛을 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강강의 매력을 만났다. 추위와 독한 훈련의 만남이 힐링과 몸의 탄성,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연이틀 제주의 칼바람에 흠뻑 두들겨 맞았다. 맞는 순간은 매웠지만 돌아보니 내 안의 피를 돌게 하는 신기루였다. 올레 14길을 걸으며 이 길은 밝은 햇살과 단호박 비닐하우스로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걸음을 마무리하는 순간엔 '매운바람이 매력적'이라고 적었다. 다시 찾은 여행자를 위한 환영식치곤 좀 거칠었지만 반가움으로 화답했다. 이제 허락된 제주 땅을 종횡무진 걸으면 될 터이다.


내일의 길은 또 어떤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을까.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여정이 참으로 좋다. 주춤거렸다면 이 멋진 여정에 올라탈 수 없었으리, 단단해서 버티는 게 아니라 나날이 조금씩 단단해지면서 두 달을 살아내는 것이리라. 나의 용기에 박수를 건네고 싶어지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