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국 인문 기행 / 서경식 / 반비
가난한 재능의 똥손을 가졌지만 때때로, 이젤 앞에 앉아있는 나를 꿈꾸곤 한다. 입가에 미소가 스며드는 몇 안 되는, 내가 인정하는 참신한 상상이요 소망이다. 그러노라니 시간 품을 내어 전시회를 찾고 미술 관련 도서를 섭렵한다. 그 순간들이 행복하다. 고요와 심원의 언어들이 나를 찾아와 그림을 읽어준다. 끝없는 수다 만찬을 즐기고 내 마음의 한 작품을 가슴에 품고 나오면 세상없는 부자가 된 기분이다. 그렇게 내 친구가 된 이는 '프리다 칼로', '르네 마그리트'다. 칼로의 그림에서는 삶의 질곡이, 마그리트의 작품은 일상적인 오브제인가 싶은데 논리를 뒤집는 반전이 있다. 두 사람 모두 내게 일탈의 짜릿함이랄까 낯선 그 무엇을 선물한다.
이 오묘한 세계가 궁금해 작년 한 해는 <난생처음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1-8 /양정무>로 채웠다. 1억여 년의 기간 인류사에 스쳐간 미술이야기를 총 망라한 책이라 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흐름을 이해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일련의 독서로 알게 된 'THE GETTY', 전시와 복원 등 작품의 생명력에 관하여 가장 탁월한 시설을 갖춘 곳이라는 글과 지난 LA화재 시 화마를 견뎌냈다는 뉴스 등이 게티 영접에 대한 갈망을 이끌었다.
웨스트 로스앤젤레스 브렌트우두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이곳은 그리스 신전을 연상시키는 건축물로 그날은 유독 하얀 건물과 푸른 하늘이 대비되며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내가 작품보다는 건물에 집중하고 있음을 아는 듯 순백의 신부처럼 웃었다. 설렜다. 부를 이룬 자가 펼쳐내는 최상, 최고의 기부가 아닐지. 이 아름 다운 공간을 무료로 관람하라니, 폴 게티는 진짜 멋진 대부호구나 감동했다. 풀 서비스에 감동하며 들어간 미술관은 고대 이집트부터 중세, 르네상스, 인상파 등 다양한 시대의 구중한 작품 수백 점을 소장하고 있는데 반 고흐의 '아이리스' 등 유명세를 치르는 작품들 앞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나는 비밀요원 모드, 다른 곳과 다른 뭔가를 찾아내고 싶은 욕구에 매몰되어 작품은 뒷전, 전시장의 구석구석에 레이저를 날렸다. 이건가? 천장에 난 자연창들, 작품의 생명력을 담보하기 위해 인공조명을 최소화하고 자연창으로 자연스럽게 빛이 스며들게 한 거구나. 유레카.
현시대에 팩트 체크는 기본, 사실 여부를 판단하느라 네이버를 뒤져 응원군을 찾았다.
이 미술관의 거의 모든 작품의 조명을 자연광만으로 해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위 부분을 자른 4각 콘 모양으로 좁아진 천정에서 재광 되는 햇빛은 블라인드 커튼 형의 그릴로 일단 조정된 다음, 사각형 벽면을 따라 점점 약해지면서 내려오다가 반사되면서 건너편 전시 벽면을 부드럽게 비추는 형식이다. 늘 미술관에서 스포트 조명이 만드는 빛의 외관석과 그림자(액자 등의)때문에 최선의 감상을 방해받았던 내가 무릎을 치며 환호하게 만든 대목이다. 물론 이 조명 방법을 위해 요구되는 공간적 비용적 손실은 적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10억 불이나 되는 거대한 예산을 들였다는 미술관에게 최선책이 보인다면 피할 이유가 무엇이랴. - 블로그 송첨지의 미련 털기 20.11.24 퍼옴-
그 외 화재 대비를 위한 첨단 설비들은 워낙 유명해서 네이버 기사들로 대신하지만 그 건물이 갖고 있는 단단함과 완벽함은 넘쳐났다. 특히 설계자인 리처드 마이어는 건축은 물론 조경의 전문가이기도 해서 정원도 빼놓을 수가 없다. 아랍 정원, 프랑스 정원 등 다양한 형식과 화재에 강한 식물 등 다양한 식물군으로 힐링 명소로 불린다. 미술관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LA 전경은 다시 보고 싶은 한 장면이기도 하다.
도착 첫날, 비몽사몽 시차와 전쟁을 치르며 방문했던 LACMA 미술관은 입구에 수십 개의 가로등을 본 것만이 선명하다. 그 이후는 아마도 몽유병 환자였을지도. 기억에 없다. 3만 원이 넘는 고액 입장료라는 딸의 볼멘소리도 귓가에 아스라이 걸려있긴 하다.
그리고 더 브로드 미술관의 초현실주의 작품들을 관람했다. 제주 전시로 친숙한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을 다시 만난 반가움을 1분간 만끽하고 '제프쿤스'와 '앤디워홀'의 유명한 작품들을 가까이에서 영접했다. 사진으로만 보던 작품을 실제 대면하는 일은 가슴 설레는 일인데 '제프쿤스'나 '앤디워홀' 모두 작품들이 특별해서 더 좋았다. 기생충에 나왔던 '바스키아' 작품, 그리고 '로이리히텐수타인' 등 보고 싶던 대작들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어서 더 흐뭇했다. 비싼 전시는 버리고 무료 전시는 만족감 100%, 아이러니한 인문 기행이 되었다.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을 읽으며 미국을 찾았다. 나도 작가의 품격으로 LA 인문기행을 써보리라 부푼 기대를 안고. 느낌을 살리려 애를 썼는데 쓰고 보니 민망함만 배가된다. 아직은 설익은 인문생도라는 깨달음, 그 도시의 문화를 음미했고 충분히 즐겼음에 일단 만족, 더 다듬어가야겠다. 의외의 수확도 있다. 딸의 미술관 사랑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두 남자도 의외로 예술 사랑이 깊었다.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진중하고 고요해서 놀랐다. 요섹남, 뇌섹남 하던데 미섹남, 아니 미즐남(미술관을 즐기는 남자)의 면모를 새롭게 발견한 기쁨이 크다. 멋진 남자들이다. 문화의 여백을 아는 동행이 있어 더 빛나는 미국여행이 되었지 싶다.
LA가 멋짐을 폭발시키는 곳인가, 매순간 멋짐이 터져나온다. 위험할 정도로.... 난장에 내 놓으니 대문 안과는 사뭇 다르다. 기마민족의 피가 이렇게 분출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