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The Father / 2020 / 플로리앙 젤레르 감독
딸의 블로그에서 시작되었다. 깊은 몰입을 이끄는 영화라며 근래에 본 영화 중 가장 여운이 크게 남는다는 후일담까지 더해지니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수건을 꼭 챙기라는 말에 제대로 기대 만발, 격정의 바다를 내달릴 작정으로 영화를 열었다.
격정의 바다는 개뿔, 빛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터널이었다. 딸인가 아닌가, 사위인가 요양보호자인가, 돌봄인가 학대인가, 어제인가 오늘인가, 이혼이야 결혼이야, 치매는 맞아?, 까지 빅뱅이전의 카오스라고 해야 하나. 혼란의 연대기였다. 지금까지의 치매 관련 영화들이 돌보는 이의 관점이었다면 이 영화는 치매인의 관점으로 서사를 풀어간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엔소니의 혼란에 고스란히 빨려 들어갔다. 내 집인지 딸네 집 인지 요양원인지 매 순간 헷갈리고 사위인지 이상한 놈인지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이런 와중에 나를 더 깊은 수렁으로 이끈 건 엔딩이다. "엄마가 보고 싶다."는 앤소니를 보호사가 품에 안아주는 딱, 그 순간에 엔딩이 올라왔다. 허망, 허탈, 이마저도 감독의 의도였을까, 규정할 수 없는 상황들, 긴가민가한 감정의 부침,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관계도, 이 모든 의문들이 들고일어나 폭발하려는 순간, 끝을 선언하는 영리함이라니. 멍하니 앉아있었다. 앤소니가 이러했을까. 매 순간이 이렇듯 절벽이었을까, 어둠의 터널 어디쯤을 걷고 있는 듯한 공포, 치매가 이러한가 싶었다.
엄마의 시간을 되짚어 본다. 엄마는 돌아가시기까지 10여 년을 치매와 더불어 사셨다. 생일 미역국을 끓여 놨으니 집에 들르라는 엄마의 전화를 받고 달려갔던 순간이 선명하다. 미역으로 가득 찼던 큰 찜통과 맹물 미역국을 맛있다시며 드시던 모습이라니. 당혹스러워하며 남매들에게 알렸고 그때는 이미 중증에 진입한 상태였다. 전조 증상이 전혀 없진 않았으나 나이 들어가는 과정에서 무뎌지고 잊어버리는 자연스러운 변화려니 넘겼었다. 그리고는 하루하루가 달랐다. 뭔가를 찾겠다고 온 집안을 뒤지시고 다섯 자식들을 번갈아 밤낮 가리지 않고 수없이 많은 전화를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전화를 걸 수 있었던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는 미세하게나마 엄마의 기억으로 사셨던 게다. 그냥 받아들였으면 좋았으련만 우리는 모질게, 저장된 우리의 번호를 지웠다. 이러다 직장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는 협박 같은 하소연을 쏟아내면서 엄마를 밀어냈다.
다른 병과 달리 치매는 독립적인 일상을 무너뜨리는 병이기에 늘 누군가가 그의 옆을 지켜야 한다. 이로 인해 간병인의 일상은 균열이 생기고 피로감이 누적되어 어느 순간, 환자에 대한 안타깝고 안쓰럽던 마음들이 조금씩 부서진다. 그리고 찾게 되는 요양원, 같은 병인을 가진 이들 속에서 전문가의 손길을 받는 것이 당신을 위해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는 명분을 장착하고 의료기관 입소를 권유한다. 불편한 마음이야 천근만근이지만 되찾은 일상의 평화가 더없이 감사하다. 양로원을 찾으면 엄마는 작게 웅크려진 몸으로 실낱같은 생존을 알렸다. 앤소니처럼 초점 잃은 눈빛으로 먼 세상을 응시한 채 우리들의 온기에도 나른하기만 했다. "엄마, 나 누구야?" 물으면 "누구시요?, "저 사람은 누가라니?", 까맣게 지워낸 기억의 테두리는 먼 옛날 추억의 이름들을 간간히 소환하더니 그마저도 힘에 겨워 말을 내려놓으시더니, 어느 날인가 보고픈 옛 인연들을 찾아가셨다. 당신이 누구인지도 잊은 채 어느 날 가만히 떠나셨다.
생각할수록 아려오는 엄마의 마지막 모습, 이것이 내 안에 각인된 엄마의 이야기다. 엄마는 그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실까. 영화 속 앤소니와 딸 앤은 같은 대화 다른 기억, 같은 상황 다른 전개를 보여준다. 엄마의 혼란스러운 시간들을 감당하느라 버거웠다는 나의 기억을 엄마는 공감과 응원의 부재에 서럽고 외로웠던 시간이었노라 울먹이실 듯하다. 앤소니가 보고 싶다고 우는 '엄마'가 상징하는 것이 절대적인 사랑과 무조건적인 내 편 아니던가. 엄마도 어쩌면 엄마가 그 어둠의 터널에서 간절히 보고 싶었던 이는 당신의 엄마가 아니었을지. 뒤늦게 헤아리는 엄마의 마음, 그땐 왜 생각지 못했을까. 영화는 또록한 정신으로 눈물 없이 봤는데 글을 쓰는 이 순간은 서러움이 복받친다. 어느덧 그때의 엄마의 시간에 서 있는 나, 그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야 보인다.
작은 체구 여린 성정을 가진 엄마에겐 버거운 병마임을 알면서도 늘 내 시간의 버거움을 앞세웠던 나다. "왜 안돼?", "기억해 보시라고요!", 어쩌면 매 순간 엄마를 위한다며 행했던 모든 일들이 엄마가 기억을 버리시는데 가속 페달이 된 것은 아닌지, 아빠의 얼굴을 베개로 누르는 앤(앤소니의 딸)의 뒷모습에 내 얼굴이 겹쳐 보였다. "엄마, 이제 그만 힘들고 아빠 만나러 가세요." , 나는 엄마가 돌아가신 후 맘껏 울지도 못했다. 내가 던진 말들이 너무 아파서, 너무 미안해서.
이 모든 아픔을 건너온 내가, 불효의 늪에 빠졌던 내가, 치매를 마주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 나는 자녀들에게 어디까지 기대하고 또 내려놓을 수 있을까, 새로운 남자를 만나 내 곁을 떠나겠다는 딸(앤은 사랑을 찾아 파리로 떠난다)을 웃으며 응원할 수 있을까, 영민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나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견뎌낼 수 있을까. 매 순간 절망을 만나리라. 그러나 내 절망에 내 가족을 호위무사로 대동하고 싶지는 않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몫을 잘 해내는 것이 최선이라 믿기에 '희생'을 자처하지도 요구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내게 병마가 찾아온다면, 나의 병마는 혈연에서 자유로운 낯선 이의 손에 맡겨주길, 그리고 병문안도 사양한다. 나의 사위어가는 몰골이 누군가에게 마지막 기억으로 새겨지는 게 싫다. 가볍든 무겁든 우리 모두 마지막인사는 병석 인사가 될 터 그 과정은 담백하고 담담했으면 싶다. 그 무엇보다 삶이 너무 길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여든을 살아내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은데 하느님이 이 대목을 마음에 새겨 주셨으면 좋겠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여기가 저기고 저기가 여기 같은 하루를 살아가야 한다면 그 하루는 24시간을 넘어 240시간쯤으로 체감되지 않을까. 97분의 상영시간이 970분처럼 여겨지는 길고 혼란스러운 한 편의 영화로 오랜만에 엄마 생각을 진하게 했다. 막걸리 사들고 한번 찾아뵈어야겠다. 엄마의 이야기, 앤소니의 이야기, 그리고 나의 이야기인 "My Father"를 만났음에 감사하다. 지혜롭게 건강을 살펴야겠다는 다짐과 더불어 영화를 열어 준 딸에게 감사를 전하며 명작에 대한 소회를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