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1 21, 22, 23장 / 미셀 드 몽테뉴 / 민음사
정답이 간절할 때면 펼쳐드는 책, 몽테뉴의 <에세>. 쉽게 풀어보겠다고 삽입한 예화는 옛이야기인양 현실감이 없고 흐름도 장황할 때가 많은데, 몽테뉴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묘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한 소절 한 소절, 누군가의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사는 거 다 똑같다고, 그렇게 살아내는 거라고 내 어깨를 토닥인다. 무엇보다 번역본을 읽는 다는 건 실타래처럼 얽힌 복문에서 영문의 궤적을 이해하는 선행 작업이 필요하다. 한글인데 한글이 아닌듯한 난해함을 이겨내야하는 몰입 독서, 순간 방심하면 문단의 맥락을 놓쳐 다시 읽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게 시간도 잊은채 몽테뉴가 들려주는 인간 군상에 빠져들다보면 네 삶 내 삶, 사람 살이에 진짜는 사랑이구나 싶어진다. 그래서 사랑이 고픈 날이면 숨어든다. 그의 이야기 속으로.
이번 방문은 자책이었다. 자책이 휘몰아치니 스스로를 나락으로 몰아갔다.
"나는 뭔가를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거 같다."
결혼 이야기를 주고받던 와중, 아들의 한마디, 모든 부분에 부족함을 느낀다는 아들은 한껏 작아진 스스로를 이야기했다. 그 안에 담긴 뜻이 겸손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들의 표정은 낙오자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출발 대형에 서 있던 새들은 저 멀리 날아갔는데 본인만 아장아장 걷고 있는 답답함이랄까, 벌어진 간격에 대한 낙담이랄까, 말속에서 고독이 느껴졌다.
작아진 아들을 위로하고 응원해야 하는데, 아들의 한숨이 내게로 파고들어 말을 삼키고 생각의 회로를 막아버렸다. 긴 적막이 흘렀다. 아들은 제법 우수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소원했던 대학 입학을 외면했고 친한 친구들의 IN서울을 축하하게 했다. 이때 꺾인 어깨가 역전의 기회를 만들어 냈으면 좋았으련만, 업무의 규모와 고연봉으로 이어지는 대학졸업장의 비정함 앞에서 한번 더 꺾어지고 있는 듯하다. 그의 성과도 작지 않은데 눈앞의 더 큰 성과에 치여 스스로 생채기를 만들며 아파하고 있다.
작아진 아이, 더불어 나도 작아진다. 이들의 건강하고 활기찼던 학창 시절, 나는 그들의 성실함에 안주했던 엄마였지 싶다. 꿈을 가진 아이로 키워내지 못했다는 자책, 단단한 성실함에 강직한 소신이 더해질 수 있었다면 우리가 지금에 와 작아진 스스로에 아파하진 않았을 텐데. 신방과를 가겠다고 고집부리던 나를 기어이 교대로 이끄셨던 나의 부모님처럼 강력한 인도자가 되었어야 했을까, 아이들에게 더 높이 나는 법을 알려줬어야 하는데 책상 앞만 고집했을까, 아빠의 부재가 위축을 키웠을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한 것 없는 서툴고 미련스러운 엄마였음을 아들의 한숨 앞에서 깨닫는다.
나에겐 늘 응원하고 자랑하고 뽐내고 싶은 멋진 아들 딸이다. 이들의 유쾌함과 따뜻함은 나는 물론이거니와 많은 이들의 웃음의 원천이다. 사회성, 인간관계, 업무를 분별하는 눈, 빈틈없이 듬직해서 사회생활도 잘 이끌어간다. 이토록 큰 재목의 아이들을 담아내지 못했다는 자책, 나는 종재기 같은 엄마였지 싶다. 성실한 공부만큼의 성실한 꿈이 아니라 한 걸음 더, 큰 보폭으로 꿈꾸는 방법을 알려줬더라면 하는 아쉬움, 그러했다면 오늘, 아들은 한숨대신 환한 웃음을 지었겠지.
"강력한 상상은 실제로 바뀐다."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나는 상상의 힘이 막강함을 느끼는 편이다. 누구나 그 힘을 느끼지만, 어떤 이들은 그 힘에 밀려 넘어지기도 한다. 나로서는 귀 뚫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다. 나의 방책은 상상의 힘을 피하는 것이지 거기에 맞서는 것이 아니다. 나는 건강하고 즐거운 사람들하고만 어울려 살고 싶다. 다른 사람의 괴로움은 실제로 나를 괴롭힌다. 내 감정은 흔히 다른 이의 감정을 그대로 내 것으로 떠안는다. 본문 189쪽
유레카!, 맥락이 맞아야만 위로가 있는 건 아닌 듯하다. 그저 우연한 순간, 우연한 문장에서 내 가슴울 울렁이게 하던 병인이 가라앉는 느낌, 몇 줄의 글이 자책에 변명거리를 제공해 준다. 상상의 힘을 믿어보는 일, 아이들이 건강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상상만으로도 아들의 한숨을 웃음으로 바꿀 수 있겠다는 희망을 만나니 우울에 햇살이 내려앉는다. 모종의 힘을 믿고 이들의 강건한 내일을 거침없이 그려간다.
옛사람들 이야기에 따르면 스키타이의 어떤 여인들은 누군가에 대해 분노가 치밀어 독기가 오르면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그를 죽일 수 있었다고 한다. 거북이와 타조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알을 부화시키는데, 그 눈길에 수태시키는 모종의 힘이 있다는 표시이다. 본문 202쪽
아이를 가진 여성들이 자기네 상상의 흔적을 태아에게 남긴다는 것이다. 무어인 아이를 낳은 여성의 경우가 그 증거이다. 보헤미아 왕이자 황제인 카를로스를 피사 부근에 사는 처녀가 알현했는데, 처녀의 온몸에 털이 무성했다. 그녀의 어미 말로는 자기 침대에 걸어 놓은 세례자 성 요한의 상 때문에 그런 모습으로 수태되었다는 것이다. - 본문 203쪽
공포에 질려 사형 집행인이 손댈 겨를도 없이 최후를 맞는 이들도 있다. 사실은 사면장을 읽어 주기 위해 묶인 몸을 풀어 준 것인데 오로지 상상만으로 지레 사형대 위에서 뻣뻣하게 굳어 죽은 사람도 있다. 본문 190쪽
'능력이 부족한 사람 같다.'는 말은 자기 객관화가 필요한 젊은이들에게는 거쳐야 할 사고과정이다. 나 또한 젊은 날 능력의 한계점에서 수없이 방황했고 앞서가는 벗들의 뒷모습에 여러 번 좌절했다. 그러나 부족함과의 정면 승부가 때론 도약의 지렛대가 되었다. 아들의 한숨이 아프고 어쩌면 그 한숨에 내 지분이 상당한 것만 같아 나 또한 많아 쓰라렸지만, 몽테뉴의 지침대로 여기까지만. 성 요한의 상을 보는 것만으로 털 가진 아이를 잉태하는 상상의 힘, 아들의 내일을 걱정으로 채워가며 지레 죽어가서는 안 되겠다. 부족한 보살핌에도 저리 멋지게 성장했듯이 작아진 어깨를 펴는 일도 거뜬히 이뤄내리라 믿는다. 모종의 힘이 그의 엔진이 되어 그의 성공을 도우리라.
인생의 결승점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신의 영역, 다른 이의 속도에 상관없이 스스로의 속도를 잘 제어한다면 우뚝 선 시상대가 내 자리일 수 있음을,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아들이 스스로가 빛나는 보석임을 알고 연마해 나가길 바라본다. 미안함을 내려놓고 큰 응원으로 그의 내일을 함께 하리라.
퇴근길, 아들의 무거운 어깨를 뜨끈뜨끈한 된장으로 녹여줘야겠다.
어김없이 이번에도 몽테뉴 아저씨가 토닥토닥, 덕분에 쉼을 찾았다. 된장국을 좀 나눠드려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