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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철 Feb 16. 2016

활용 한국사 1 - “한명회도 못하던 짓이다”

활용 한국사 1 - “한명회도 못하던 짓이다”     


1680년(숙종 6년) 3월 28일, 영의정 허적은 자신의 할아버지 허잠에게 왕이 내린 충정공(忠貞公) 시호를 맞이하기 위해 잔치를 열고 조정 신료들을 초청하였다. 잔치가 열린지 얼마 되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숙종은 비 때문에 잔치를 할 수 없을까 염려하여 내시에게 명하여 궁궐에서 쓰는 기름 먹인 장막과 차일을 허적에게 가져다 주라고 명하였다. 잠시 뒤 내시가 대답하기를 “벌써 영의정께서 궁궐 잔치에 쓰는 장막과 널판지와 밧줄을 가져갔습니다.”하였다. 

숙종은 매우 놀라 내시를 시켜 잔치하는 곳에 가서 이 말이 사실인지 보고 오도록 하였다. 내시가 은밀히 살펴보니 과연 궁궐의 장막이 잔치에 쓰이고 있었다. 잔치를 살펴 본 내시의 보고를 받은 숙종은 대노하였다. “궁궐의 장막을 마음대로 가져가는 것은 한명회도 못하던 짓이다!!!”

한명회는 200여 년 전에 죽은 인물인데, 왜 숙종의 입에서 한명회가 나왔을까? 사건은 거슬러 1481년 6월 25일로 올라간다.

이때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 와 있었는데, 사신들은 한명회의 정자인 압구정에 가서 놀기를 청하였다. 청을 받은 한명회는 성종에게 아뢰기를 “날은 더운데 압구정은 좁아 잔치를 차리기 어려우니, 궁궐에서 쓰는 큰 장막을 정자 옆의 평평한 곳에 치게 하소소.”라고 하였다. 

성종은 “압구정이 좁다면 제천정(한강진 나루 위에 있는 정자로 압구정의 맞은편에 자리함)에서 잔치를 하도록 해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한명회는 왕의 말을 따르지 않고 따로 장막을 치는 것이 불가하다면 압구정 처마에 잇대는 장막을 내어줄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성종은 압구정이 아닌 제천정에서 잔치를 하라고 했는데 왜 재차 장막을 청하냐며 압구정에 장막을 치지 말고 제천정에서 잔치를 열 것을 강한 어조로 명하였다. 

그러나 왕의 말을 순순히 따를 한명회가 아니었다. 세조로부터 ‘나의 장량’이라는 칭찬을 받으며 수십년 동안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한명회였다. 압구정에서의 잔치를 허락받지 못한 한명회는 자신의 최후를 맞이할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었다.

“신은 정자가 좁고 더위가 심하기 때문에 아뢴 것입니다. 신의 아내가 오래 묵은 병이 있는데다 요즘 더위에 지쳤으므로, 신이 그 병세를 보아서 심하면 제천정일지라도 가지 못할 듯합니다.”

거듭된 왕의 명령에 명백한 거부의 뜻을 밝힌 것이다. 이에 승정원 승지들이 들고 일어났다. 승지들은 한명회의 말이 지극히 무례하니,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한명회는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심지어 성종은 도성 밖으로 내쫓으라고 명하였다. 야사에서는 삭탈관직되자 분을 이기지 못한 한명회가 도끼로 자신의 집 대들보를 내리찍었다고 한다.

숙종이 말한 “한명회도 못하던 일”이란 바로 이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권력의 남용이 도를 넘어서는 사건에 활용할 수 있는 고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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