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철 Feb 16. 2016

활용 한국사 2 - “공민왕과 신돈의 맹세”

“최근 국가의 기강이 크게 무너지니 국민들의 재물을 탈취하는 일이 유행을 이루어 종묘·학교·창고·사사(寺社)·녹전(祿轉)·군수전(軍須田)과 같이 기관의 운영을 위한 논밭과 대대로 물려받은 민초들의 논밭을 권세 있는 가문들이 거의 다 빼앗아 버렸다. 반환하라는 결정이 내려졌는데도 그대로 붙들고 있고, 때로는 양민을 노비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주·현(州縣)의 역리·관노·민초 가운데 병역과 부역과 조세 등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도망한 자들을 모조리 숨겨 놓고 농장을 크게 일으키는 바람에 민초들과 나라는 쇠잔해졌으며 하늘도 분노해 홍수와 가뭄을 내리고 돌림병 또한 끊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도감을 설치해 이제까지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하니, 개경은 15일, 각 도는 14일을 한도로 자신의 잘못을 알고 스스로 고치는 자는 죄를 묻지 않을 것이나, 기일이 경과한 후 발각되는 자는 그 죄를 조사해 다스릴 것이며, 거짓으로 고발하는 자는 도리어 처벌할 것이다.” - 연려실기술


1366년, 한 장의 포고문이 고려를 뒤흔들었다. 그것은 고려 대부분의 땅과 사람과 재물을 소유하고 있던 권문세가들에게는 충격을, 가진 것 없이 천한 신분으로 비참하게 살던 민초들에게는 희망을 안겨 주는 포고문이었다. 그것은 신돈이 공민왕에 의해 발탁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썩어 문드러진 고려 정치를 개혁하기 위한 칼을 뽑아든 신호탄이기도 하였다. 

당연히 이에 대한 반응은 신분계급에 따라 극명하게 달라졌다. 토지를 돌려받고 노비에서 해방된 민초들은 “성인(聖人)이 나타났다”며 찬양하였으나, 권문세가와 유생들은 근본없는 천하의 잡것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며 맹비난하였다. 

공민왕이 노비의 아들로 태어난 이름없는 승려에 불과한 신돈을 과감하게 발탁하여 권력을 위임한 것은 유생과 벌족에 대한 불신때문이었다. 나라가 오래되다 보니 나라에 공이 많고 대대로 벼슬을 한 집안인 벌족들은 서로 얽히고 얽혀 당파를 이루고, 신진사대부들은 여리고 나약해 개혁을 추진하기에는 부적당하고 또 한 번 이름을 얻으면 입신양명의 욕망에 사로잡혀 그르치기 일쑤였다. 신돈은 천한 가문의 출생으로 불교계에도 기반이 전혀 없었고, 승려로서 욕심이 없다는 점과 태어나면서부터 밑바닥 생활을 해 현실 개혁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점이 공민왕의 발탁 배경이었다. 

공민왕과 신돈은 1358년 김원명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고 전해진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364년 공민왕이 신돈에게 수행을 그만두고 세상을 구하라고 요청하여 신돈이 정치에 나서게 되는데, 이 때 공민왕이 신돈에게 했던 맹세가 있다. 

“일찍이 듣자오니 임금과 대신들은 참소(남을 해치기 위해 거짓으로 죄를 꾸며 일러바침)와 이간질을 잘 믿는다던데, 이런 일을 하지 않으셔야 세상이 복되고 이롭게 될 것입니다.”

“대사는 나를 구하고 나는 대사를 구할 것이며, 다른 사람의 말에 미혹되는 일이 절대 없을 것을 부처와 하늘 앞에 맹세하노라.”

공민왕은 맹세를 글로 작성하여 신돈의 의심을 풀어주었다. 공민왕 또한 신돈에게 맹세를 요구하였다. 신돈이 한 맹세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해지지 않으나, 아마도 권력을 이용한 부정축재를 하지 않겠다는 내용으로 보인다. 신돈을 사형에 처할 때 공민왕은 이 맹세를 가지고 신돈의 죄를 추궁했다. 

“네가 전에, 부녀자들을 가까이 하는 것은 그 기운을 이끌어다 기를 기르는 것일 뿐 절대 사통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듣건대 자식까지 낳았다고 하니 이런 것이 맹세문에 있었더냐? 도성 안에 저택을 일곱 채나 지었으니 이런 것도 맹세문에 적었던가?”

신돈을 죽이면서 공민왕의 개혁 정치는 끝내 막을 내렸다. 신돈이 죽고 3년 뒤, 공민왕 또한 황음무도에 빠져 비참하게 살해되었으니 “공민왕과 신돈의 맹세”란 지켜지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하는 정치인들의 약속을 뜻하면서도, 그 맹세가 깨질 때는 서로가 서로를 파멸로 이끌어 갈 수 밖에 없는 약속이다.

안철수 대표와 민주당이 합당하면서 했던 각종 맹세와 약속도 “공민왕과 신돈의 맹세”에 비길 수 있다. 이제 맹세는 깨졌고, 서로 공멸은 “공민왕과 신돈의 맹세”처럼 뻔한 상황이다. 

작가의 이전글 활용 한국사 1 - “한명회도 못하던 짓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