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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철 Feb 16. 2016

활용 한국사 3 - “장중거의 어리석은 은거”

18세기 한양에 살던 장중거는 팔 척에 달할 정도로 큰 키를 지녔고, 기개가 남보다 뛰어나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은 호방한 인물이었다. 그의 단점은 술을 몹시 좋아하여 한 번 마시면 반드시 크게 취하게 되고 또 취하게 되면 빗나가는 말이 많았다. 그로 인해 동네 사람들이 괴롭게 여겨 장중거를 미친 사람이라 손가락질 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비방하는 말이 자자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술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하루는 어느 술자리에서 큰 주사를 부렸는데,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장중거를 관아에 고소하려 하였다. 

이 얘기를 들은 장중거는 자신의 행실을 뉘우치며 ‘내가 아마 이 세상에서 용납되지 못할 모양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궁리 끝에 비난을 피하고 해로움을 멀리할 방법을 생각해 낸 장중거는 거처하는 방을 깨끗이 쓸고 문을 닫아걸은 뒤 발을 내리고는 종이에다 크게 ‘이존(以存)’이라 써서 집에 걸어 놓았다. ‘이존’이라 함은 《주역》에서 “용과 뱀이 칩거하는 것은 몸을 보존하기 위함이다(용사지칩龍蛇之蟄 이존신야以存身也)”라고 했으니 이에서 취한 것이다.

그리고는 하루아침에 상종하던 술꾼들을 사절하며 말하기를 “자네들은 그만 물러가라. 나는 장차 내 몸을 보존하려 한다.”고 말했다. 

장중거의 이러한 행실을 들은 박지원은 그를 찾아갔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대가 몸을 보존하려는 방법이 이에 그친다면 화를 면하기 어렵겠다. 비록 독실하고 경건했던 증자(曾子, 공자의 제자)로서도 죽을 때까지 외우며 실행한 것이 어떠했는가. 항상 하루아침, 하루저녁도 무사히 넘기기 어려울 듯이 하다가 죽는 날에 이르러서야 손발을 살펴보게 하고 비로소 그 온전히 살다가 돌아감을 다행으로 여겼는데 더더구나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서랴. 한 집을 미루어 한 지방을 알 수 있고 한 지방을 미루어 온 누리도 알 수 있다. 온 누리가 저처럼 크지만 일반 사람들의 처지에서 보자면 거의 발을 용납할 땅조차 없을 지경이다. 하루 사이에도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몸소 겪어 보면 요행히 살고 요행히 화를 면한 것이 아님이 없다. 

이제 그대는 외물이 자기를 해칠까 두려워 밀실에 칩거함으로써 자신을 보존하고자 하나 자신을 해치는 것이 제 몸 안에 있음을 모르고 있다. 비록 발길을 멈추고 그림자를 감추어 스스로 옥살이하듯이 산다 한들 끝내는 더욱더 사람들의 의혹을 사고 분노를 모으기에 족할 뿐이니, 그 몸을 보존하는 방법이 서투르지 아니한가.

슬프다! 옛사람 중에 남들의 시기를 걱정하고 헐뜯음을 무서워한 자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래서 대개는 농사터에 숨고 산골에 숨고 낚시터에 숨고 백정이나 행상 노릇에 숨었는데, 숨는 데 교묘한 자는 흔히 술에 몸을 숨겼으니 유백륜(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술의 미덕을 칭송하는 글을 지었다. 하인에게 삽을 짊어지고 따라다니다 자신이 술마시다 죽으면 그 자리에서 파묻도록 한 고사가 전해진다)과 같은 무리야말로 교묘하다 하겠다. 그러나 삽을 짊어지고 뒤를 따라다니게 한 것을 보면 또한 몸의 보존을 도모함에 치졸하였다 할 것이다. 이는 왜 그런가?

저 농사터, 산골, 낚시터, 백정이나 행상 노릇 같은 것은 모두 외물을 빙자하여 그 뒤에 숨은 것이다. 하지만, 술의 경우에는 부지중 아득히 빠져 스스로 그 본성을 미혹시키는 것이니 자기 형체를 잊어버리고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시체가 구렁텅이에 내버려져도 걱정하지 않게 되는데, 까마귀와 솔개, 땅강아지와 개미 따위가 뜯어 먹는 것쯤이야 안중에 있을 까닭이 있겠는가! 이는 술을 마심이 자기 몸을 보존하고자 함인데 삽을 짊어지게 한 바람에 누를 끼치고 만 것이다.

지금 그대의 과실은 술에 있는데, 여전히 자신의 몸을 잊지 못하고 몸 보존할 바를 생각한 나머지 손님을 사절하고 깊이 숨어 살며, 깊이 숨어 사는 것이 자기를 지키는 데 부족하게 되자 또 함부로 스스로 당호를 써서 남들이 보게 걸어 놓으니, 이는 유백륜이 삽을 짊어지게 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하였다.

박지원의 말을 들은 장중거는 두려워하며 한참 있다가, 물었다.

“그대의 말과 같을진댄 나의 팔 척 몸을 장차 어디로 던진단 말인가?”

“나는 능히 그대의 몸을 그대의 귓구멍이나 눈구멍 속에 집어넣을 수 있다. 아무리 천지가 크고 사해가 넓다지만 그 눈구멍이나 귓구멍보다 더 여유가 있을 수 없으니 그대가 이 속에 숨기를 바라는가?

무릇 사람이 외물과 교접하고 일이 도리와 합치하는 데에는 도가 있으니 그것을 예(禮)라고 한다. 그대가 그대 몸을 이겨내기를 마치 큰 적을 막듯이 하여, 이 예에 따라 절제하고 이 예를 본받으며 예에 맞지 않는 것을 귀에 남겨 두지 않는다면 몸을 숨기는 데에 무한한 여지가 있을 것이다. 눈이 몸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니, 예에 맞지 않는 것을 눈에 접하지 않는다면 몸이 남의 흘겨보는 눈초리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입의 경우에도 또한 그러하니, 예에 맞지 않는 것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면 몸이 남의 헐뜯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마음은 귀와 눈에 비해 더욱더 넓디 넓으니, 예에 맞지 않는 것으로 인해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다면 내 몸이 진실로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어 장차 어디로 가든지 보존되지 않을 것이 없을 것이다.”

“이는 그대가 나로 하여금 내 몸 안에 몸을 숨기고, 몸을 보존하지 않음으로써 보존하게 하고자 함이니, 감히 벽에 써 붙여서 돌아보고 살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박지원은 《논어》에 나오는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마라.”를 가지고 몸은 외물에 숨기는 것이 아니라 예에 숨겨 보존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장중거의 어리석은 은거”란 술이 깨서는 전날 밤에 자신이 저질러 놓은 언행을 후회하면서 술을 끊겠다고 결심하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일깨움을 주는 고사이다. 주사 때문에 술을 끊겠다는 친구가 있다면 “장중거의 어리석은 은거”를 행하지 말 것을 충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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