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철 Feb 19. 2016

활용 한국사 18 - “정몽주의 충절”

정몽주와 정도전은 이색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운 동문이었으나 한 명은 고려의 개혁을 통한 성리학적 이상의 실현을 추구하였고, 한 명은 새 왕조의 개창을 통해 요순 시대를 한반도에 구현하고자 하였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에 있어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조선 왕정의 거의 모든 제도의 초석을 놓았고 조선을 성리학의 나라로 만들었다. 그러나 권력투쟁에서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었다. 정도전을 죽인 뒤 이방원은 세자 이방석에 당부(黨附)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죄명을 씌웠다. 파당을 만들어 이방석에 붙어 나라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다. 이후 조선왕조 시대 내내 그에 대한 평가는 대역죄인이라는 네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뿐 아니라 후대로 갈수록 정도전에 대한 평가는 인색해져, 두 왕조를 섬긴 변절자, 처세에 능한 모사가로 평가되었다. 그에 대한 복권은 5백여년이 흐른 1865년(고종 2년)에서야 이루어졌다. 그 해 공신 칭호를 다시 돌려주었고, 고종은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조선 개국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정도전이 조선 시대 내내 대역죄인이 되었던 반면, 조선 개국에 가장 크게 반대를 한 정몽주는 조선 시대 내내 충절의 상징이 되었다. 그것도 그를 죽인 이방원에 의해 복권되어 영의정부사에 추증되기까지 하였다.  

둘다 이방원이 죽였고 이방원에 의해 역사의 평가가 달라졌다. 정도전의 죽음보다는 정몽주의 죽음이 낫다. 두 정씨의 죽음이 시사하는 바는 충의와 절개는 시대가 변해도 가치가 있다는 점이다. 역사가 사마천은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기 마련이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이는 죽음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정도전의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게 되었고, 정몽주의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게 되었다. 


선거의 계절이 다가오니 이리저리 이합집산이 시작되었다. 충절이 박제화된 지금 “정몽주의 충절”이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엉덩이가 가벼운 이들에게 “정몽주의 충절”을 들려주자. 

작가의 이전글 활용 한국사 18 - “어쩔 수 없이 서인이 된 이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