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소정 Nov 16. 2020

스무 살, 고삐 풀린 공주

  2013년 12월 31일 오후 열한시, 스무 살이 되는 밤12시를 밖에서 맞고 싶다며 엄마를 조르고 졸라 집에서 나섰다. 열한시 오십분, 홍대입구역 9번 출구 KFC 앞에서 친구들과 만났다. 지하철역 출구까지 올라가는 데에만 해도 줄을 한참 섰었다. 그렇게 모두가 들떠있는 9번 출구 앞에서 그 시절 사라져가는 휴대폰 DMB기능으로 12시 보신각 종소리를 듣고 출동했다. 장렬히 불태운 밤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선 이 신세계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를 곱씹으며 잠이 들었다. 그렇게 뜨거운 겨울을 보내다 보니 어느 새 3월, 대학교 입학식이 다가오고 있었다.      


  대학교 입학식 전 날까지 엄마는 나에게 다시 생각해보라고 늦지 않았다며 나를 쫓아다니며 말했다. 나는 “재수 안 해.” 라는 대답으로 일관했었다. 물론 고등학교 3학년때 내가 따르던 담임 선생님께서도 나에겐 통하지 않으니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공부를 1년 더 해보자고 했었다. 그의 마음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내내, 마지막 평가원 모의고사가 있던 9월까지만 해도 서울의 상위권이라는 대학들에 언론홍보학과, 신문방송학과 수시 논술전형 지원을 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능날 울면서 한 가채점에서결과 모든 과목의 등급이 평소에 모의고사에서 보던 숫자의 두 배, 세 배를 보여주면서 좋은 말로 말하자면 “망했다.” 는 표현밖에는 없었다. 그 길로 미리 예약해두었던 논술학원 수업들을 모조리 환불받으러 갔다. 지원한 여섯 개 중 단 하나의 최저등급도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틀밤정도는 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뭐 별거 있나? 이미 지나간 일이었고 내가 뒤집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정시입시설명회에 다니는 친구들도 있었고 수능성적표가 나오자마자 재수학원에 들어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담임선생님과 엄마의 작전으로 취업이 잘된다는 ‘간호학과’를 선택하기로 했다. 심지어는 서울에, 비교적 가까이 있던 간호학과는 붙은 줄도 모르고 가지도 못했다. 그만큼 관심 없던 나의 대학 입학이었다. 학창시절 내내 자습실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도 ‘한 번 더 해보는거 어때?’ 눈빛으로 한마디씩 건넸지만 나는 멋진 척 하느라 정신없었다. 입시라는 스트레스는 더는 받기 싫었다. 아주 고삐 풀린 망아지가 따로 없었다.      


  그렇게 입학한 대학 생활은 역시나 나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학교가 싫었던 이유는 정말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선, 한 시간씩 버스를 타고 가야했다. 또, 수학은 좋아했지만 과학이 싫어 문과를 택했던 나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전공 수업들이었다. 해부학이니, 약리학이니 뭐니, 생물과 화학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로 수업을 들으니 원래 듣기 싫었지만 더 듣기 싫어졌었다. 그리고 왠지 나 자신이 너무나도 이방인 같았다.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매일 같이 모여 술을 마시던 동기들도 많았고 교수님과의 관계도 좋았다. 그렇지만 벗어나고 싶은 느낌은 하루하루 지날수록 제곱이 되어 커져만 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와 친하던 몇 명의 친구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과 휴학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학기 초반에 휴학을 했고, 집에 말할 자신이 없던 나는 가족들을 완전히 설득한 후에 휴학계를 내게 되었다. 휴학계는 1학기가 끝난 후 내게 되었지만 자체 휴학은 이미 학기 초에 친구들과 함께 시작했다. 집에서 보는 나는 학생이었지만, 학교에서 보는 나는 심심하면 학교에 나오는애 였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정말 악착같이 노력해야했다. 주말 알바로 벌었던 용돈은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집에서 나선 뒤 혼자 시간을 보내는데다가 써야했다. 장소도 다양하다. 영화관, 전시회, 카페, 스포츠 경기장 등등. 그렇게 한 학기의 시간이 모두 지나가고 그제서야 부모님을 앉혀놓고 이야기를 꺼냈다.

“나 공부 다시하고 싶어.”

반길 줄 알았던 부모님은 듣자마자 “안 돼.” 라고 답했다. 솔직히 많이 당황스러웠다.

“왜? 나한테 맨날 재수하라고 했었잖아. 이제 할게. 요즘은 반수라고 이렇게 중간부터 시작하는 사람 많대. 나 재수학원 보내줘. 나 학교 다니기 싫어.”          


  며칠의 전쟁 끝에 휴학도, 재수학원도 오케이 받아냈다. 당장 다음 주부터 친구가 다닌다는 학원에 나가기 시작했다. 학원 자습시간 중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김소정 학생인가요?”

“네 맞아요.”

“나 000교수에요. 시험을 안봤길래 연락했어요. 혹시 무슨 일나 해서. 재시험은 다음 주쯤 볼 예정이니까 그 때 나오세요.”

“교수님, 저 반수하려고 휴학해서요, 재시험 안 봐요.”

세 명의 교수님들에게 전화를 받았었지만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발칙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그리고 훗날 저 답변과 결정이 나에게 어떤 피눈물을 가져왔는지 그렇게 아찔할 수가 없다.      


  6월에 학원을 다니고 11월에 인생 두 번째 수능을 봤다. 그래도 작년보다는 나은 점수로 서울에 있는 대학들의 전혀 관심 없는 학과들에 지원해봤다. 경영학과, 호텔경영학과, 생명공학과 등등. 입시 전형이 매년 심하게 흔들리던 때라, 예년이라면 충분히 빠졌을 만한 모두 한 자리수의 대기번호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곳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역시 나는 공부로 잘 될 팔자는 아니구나 싶었다. 뭐 어쩔 수 없었다. 휴학 기간은 1년, 내년 9월 새 학기가 시작할 때까지 자유시간이었다.      


  이 휴학기 동안, 가장 많은 후회를 하며 지냈다. 어차피 돌아가게 될 거였다면 좀 더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면서 말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내가 초라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도로 한복판을 올려다보면 큰 건물이 먼저 보이는 것처럼 내 주변에 커다래 보이는 사람들부터 보이기 때문이다. 그 한없이 커 보이는 친구들 중에는 휴학을 하고 투잡, 쓰리잡 아르바이트를 해 유럽 여행을 다녀온 친구도 있었고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온 친구도 있었고, 해외봉사를 다녀온 친구도 있었다. 그들이 뭐라도 멋진 일을 할 때 난 허송세월을 보낸 것 같았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을 졸업할 때 교문을 나서고 어리숙한 성인이 되었고 나는 막연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수능? 그거 뭐라고. 못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실패 하나에 너무 연연해 나를 ‘안될 사람’으로 치부해버리고 말았다. 잘난맛으로 살던 어린 사람에게 그 실패는 너무 컸었고 아무도 그것이 실패가 아님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막다른 길이 나와 주저앉아 버린 나는 돌아가는 법을 몰랐다.     


  그것만이 내 세상일 때가 있다. 그렇다면 그런 거지. 그것만이 당신의 세상이라면 그거 하나만 보고 달려나가길 바란다. 마음만은 우사인 볼트 저리가라 할 정도로 말이다. 대신 내가 꼭 하나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닌 세상도 받아들일 준비가 필요하다.

작가의 이전글 다 잘하라고 해서 미안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